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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문사설선집 1권, 매일신문, 제국신문
 

2003-01-22 

일시 : 2001년 3월 3일(土) 오후  3시~7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3회의실
참석 : 하영선, 최정운, 김영호, 손  열, 김용직, 안인해, 신욱희, 김석근
독회내용 : 『한국신문사설선집』1권, 매일신문, 제국신문

 


 

주요토론내용

손  열 교수
『매일신문』의 사설에서는 신문의 목적을 문명개화와 백성합심의 도구로 파악하고 있다. 조선의 현실을 개화당도 수구당도 아닌 눈먼 사공이 배를 젓는 격(p. 481)으로 보고, 타신문에서와 달리 나라의 잘못은 백성의 잘못이라고 말하며 교육의 대상으로 파악했던 民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매일신문』에서 주목할 수 있는 부분은 국제정치적인 측면에서 조선의 주위를 둘러싼 열강들이 조선에 조그만 틈이라도 보이면 언제라도 그 제국주의적인 본성을 드러낼 것이라는 인식과 함께, 군사뿐 아닌 경제적 이익을 착취하는 비공식적인 제국주의를 인식(p. 480)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동학난을 거울삼아 정부부패를 일소하고(p. 546), 법에 의한 통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중상주의적인 상업을 진흥(p. 542)할 것, 유학에 대해 태평무사할 때나 강론할 학문이라는 주장(p. 526) 등을 주목할 만하다.

 

김용직 교수
『제국신문』을 통해서 19세기 말 개화담론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개화사상과 더불어 신문, 교육기관, 사법기관, 관공서 등 개화를 위한 제도에 대한 비교를 통한 종합적인 검토를 통해 시대적 담론구조를 따져보는 것이 필요하다. 더불어 서유견문에 대한 검토, 동시대 중국과 일본과의 사상적 수용정도의 비교를 통한 비교사회학적 연구, 정치제도와의 관련성, 동양적 담론, 개화적 담론, 동도서기적 관점, 변법적 관점, 민족주의적 담론 등 여러 담론 등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제국신문』은 이승만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데, 1899년 감옥에 가서도 사설을 보내 연재하고 있다. 국제정치 분야에서는 중국이 수구당이 권세를 빼앗고, 개화당을 탄압하여 대내적 개혁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며 구제도의 모순과 취약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신문과는 달리 조선의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고 대한제국 황제를 중심으로 단합하여 중심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정운 교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

 

김용직 교수

안창호와 서북계열인 동우회와 이승만, 신응우 계열의 협성회의 충돌에서 당시의 현실정치판, 독립운동세력 내부의 알력관계를 볼 수 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은 이승만의 『독립정신』에서는 개화사상으로 모아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정치적인 라이벌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박지향 교수

그 노선의 차이가 이념적인 정향이 아닌 지연과 학연, 감정대립이 아니었는지?

 

최정운 교수

『매일신문』에 대한 발표에서 볼 수 있듯 ‘개화당도 수구당도 없이 여러 가지 섞은 당’이라는 표현이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하영선 교수

우선 무엇을 기준으로 나누는가에 따라 다를 수 있겠다. 서양에 대한 대립의 각에서 보면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셋 중 개화당은 추상적인데, 『매일신문』이나 『제국신문』을 보아도 개화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글도 있지만, 과연 개화라는 이름에 걸맞는 정치적 파당이 존재했었는가하는 문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1898년이면 청일전쟁, 삼국간섭, 을미사변이라는 격변이 지나간 시기인데, “나라가 망한다”는 추상적인 인식만이 있었을 뿐, 철저한 개화에 대한 의지는 아직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박지향 교수

『독립신문』이 주위의 나라들을 어르고 쓸어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반면에 보다 현실적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 지킬 수 있는 나라는 없다’는 인식까지 가고 있지만 사실상 독립에 대한 절실한 인식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독립신문』과 『제국신문』의 차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시 개화에는 동일한 노선이 없지 않는가?

 

최정운 교수

東學은 개화파나 수구파가 모두 비판하고 있는데 사실 ‘피흘리지 않고는 독립을 지킬 수 없다’라고 하는 인식인 동학과 의병이 서서히 다르게 평가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 신문의 이름이 『제국신문』임을 미루어 볼 때 이 시대의 사회적 맥락에 사회진화론이 짙게 영향을 드리운 것으로 보인다.

 

하영선 교수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답답한 것은 삼국간섭 후 일본의 후퇴가 ‘일정한 계획이 잡혀 있는 작전상 후퇴’였는데 지금 우리의 신문에서는 그에 대한 아무런 수읽기가 없었다.

 

김용직 교수

1900년 4월 1일자 신문 사설 ‘지금이 어느 때인가?’를 보면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는 시대라고 언급하고, 러일전쟁을 예상하는 듯한 대목도 볼 수 있다. 동학과 관련해서 그들에게는 광제창생이 보국안민보다 중요한 이슈였다. 동학의 관심사는 주로 사회경제적인 것이었고, 反日보다는 대원군의 복귀를 더 염두에 둔 운동이었다. 동학의 민족주의적인 성격은 드러난 것이 아닌, 잠재적인 것이었고 일본의 탄압을 받고 나서야 반외세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최정운 교수

동학에 대한 태평천국운동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는데, 태평천국운동의 기본적인 사상은 반외세였다. 양반 대 상놈으로 싸우는가 혹은 조선인 대 일본인으로 싸우는가 하는 문제는 충분이 같이할 수 있다.

 

하영선 교수

문제는 동학의 민족주의적 맹아를 개화팀들이 끌어올려서 근대적인 맥락에서 구체화시켰어야 했다는 것, 사실 그렇게 하지 못했다.

 

박지향 교수

국사학계에서는 요즈음 동학과 농민혁명을 구분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김용직 교수

개화파와 보수파의 타협가능성이 1880년대와 1890년대가 다르다고 생각된다. 우선 1884년, 1885년에 외국과 수교를 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균세의 국제정치’를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외교관 중심의 정동차가 만들어진 것도 그 일단으로 보아야 한다. 갑오경장 때 한성재판소 등의 제도적 변화의 폭이 컸기 때문에 이런 제도적 변화를 집대성하는 과정에서 개화파들의 고민 또한 달라졌을 것이다.

 

박지향 교수

『매일신문』에서 발제 때 나왔던 ‘民’의 적극적 역할 강조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그 民이 동학도까지를 포함하는 것이 아닌 ‘개명된 소수’가 아닌가?

 

손   열 교수

계급이나 민족 차원이 아닌 추상적인 ‘民’으로 이해해야 하며, 이 신문에서의 맥락은 정치 엘리트의 상대적 개념으로 이해된다.

 

박지향 교수

‘국민국가(nation-state)'라는 용어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 나왔는데, 이승만이 쓴 ‘民國’이라는 용어는 이의 직역이 아니겠는가?

 

김용직 교수

중세에 신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이 민감한 문제였던 것처럼, 이 시대에 완이 아닌 民이나 民國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김영호 교수

독립협회의 활동 중 고종에 대한 완전한 반감을 드러내는 문서나 증거가 있는지?

 

하영선 교수

당시에 대두되었던 박영효 대통령, 윤치호 대통령설 등과 같이 드러내놓은 증거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김용직 교수

고종은 왕은 여러 정치세력들 사이의 관계나 다툼을 중재하고 심판하는 역할을 한다는 패러다임을 그대로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있어 정치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임이 분명하고 따라서, 독립협회의 세력이 커진다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집담회 결과보고서 2차


일시 : 2001년 3월 3일(土) 오후  3시~7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3회의실
참석자 : 하영선, 최정운, 김영호, 손  열, 김용직, 안인해, 신욱희, 김석근
윤독내용 : 『한국신문사설선집』1권, 매일신문, 제국신문

 

이날 독회는 참석자 중 1인의 발제 후 그 시기 해당신문의 사설에서 발견되는 국내적 국제적 상황변화와 그에 대한 논자들의 시각을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토의된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음.

 

<매일신문>
- 신문의 목적을 문명개화와 백성합심의 도구로 파악 
- 타신문에서와 달리 교육의 대상으로 파악했던 民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
- 국제정치적인 측면에서 조선의 주위를 둘러싼 열강들이 조선에 조그만 틈이라도 보이면 언제라도 그 제국주의적인 본성을 드러낼 것이라는 인식과 함께, 군사뿐 아닌 경제적 이익을 착취하는 비공식적인 제국주의를 인식
- 정부부패 일소, 법에 의한 통치, 중상주의적인 상업진흥 등을 주장하며 유학비판

 

<제국신문>
- 19세기 말 개화담론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개화사상과 더불어 신문, 교육기관, 사법기관, 관공서 등 개화를 위한 제도에 대한 비교를 통한 종합적인 검토를 통해 시대적 담론구조를 따져보는 것이 필요
- 더불어 서유견문에 대한 검토, 동시대 중국과 일본과의 사상적 수용정도의 비교를 통한 비교사회학적 연구, 정치제도와의 관련성, 동양적 담론, 개화적 담론, 동도서기적 관점, 변법적 관점, 민족주의적 담론 등 여러 담론 등에 대한 검토가 필요 『
- 이승만이 1899년 감옥에 가서도 사설을 보내 연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
- 국제정치 분야에서는 중국의 실패가 수구당이 권세를 빼앗고 개화당을 탄압하여 대내적 개혁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며 구제도의 모순과 취약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신문과는 달리 조선의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고 대한제국 황제를 중심으로 단합하여 중심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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