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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일기>4권-2
 

2003-01-22 

99년 11월 세미나 기록

 

일시 : 1999년 11월 27일(土) 오후 3시-8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귀빈실
참석 : 하영선, 김용직, 김영호, 손열, 김석근, 박명규
독회내용 : <윤치호일기> 4권

동주 기념 학술회의 review

 


 

주요토론내용

 

하영선 교수 

94-95년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윤치호의 입장 설명. 한철호 박사의 분류([친미개화파연구])를 보면 친미개화파는 정동파로 분류되고, 또한 정동파는 보빙사 등 서재필과 윤치호, 왕실하고 가까운 그룹 등 3부류로 볼 수 있음.

 

김용직 교수

유길준은 윤치호의 입장을 견제하거나 또는 끌어들이기 위해 접촉을 많이 시도했을 것임.

 

하영선 교수

94-5년 중반까지가 유길준의 전성기였음.

 

김영호 교수

약자 중 T.M.은 누구인가?

 

김용직 교수

독립협회는 결국 국제정치적인 support를 전혀 받지 못할 정도로 서재필이나 윤치호가 나이브했음. 우리가 알고 있는 친일파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음.

 

하영선 교수

일본은 사실 [독립신문]의 탄생을 부담스러워했음. [독립신문]은 문명의 모델로는 일본 모델을 설정했으나, 현실적으로는 싫어한 측면도 있었음.

 

김용직 교수

윤치호, 서재필은 political leadership을 창출할 아이디어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 같음. 박영효와 김옥균은 반면에 그런 것이 있었음.

 

김영호 교수

만약 박영효가 일본에 붙어 왕과 민비를 제거했다면?

 

하영선 교수

개혁 프로그램(상부의 정치권력 측면), 리더십, 민(사회세력)을 개혁의 3대 요소라고 한다면, 이 시점에서 서재필과 윤치호의 프로그램은 세련된 측면이 있으나, 정치적 리더십 측면에서는 박영효와 김옥균보다 나이브한 것이 사실임. 또한 민과의 관계는 별도로 고려해야 함.

 

김용직 교수

고종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틀을 깨지 않고서는 개혁 자체는 난망한 일이었고, 그런 점에서는 김옥균이 근대와 전근대의 차이점을 분명히 인식했다고 볼 수 있음.

 

김영호 교수

[서울에 남겨둔 꿈] 등에서 일본의 대한 정책의 전반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음.

 

박명규 교수

근대적 국가도 아니고 봉건제적 제후 체제도 아니지만, 조선왕조의 독특한 중세적 관료체제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음. 그러나 어느 순간 지방이 무력해지게 되기는 했음.

 

김영호 교수

동학은 지방세력화의 가능성이 없었나?

 

박명규 교수

주도부는 정치적 식견이 있었지만, 국가변혁에 관한 프로그램이 뚜렷하게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음. 그러나 1904년 전후 진보화 운동을 근간으로 지방동원의 모습들이 나타남. 그런 세력들이 독립협회세력과 연결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음.

 

하영선 교수

독립협회가 한 10년 정도 더 갔어야 되는 것 아닌가?

 

박명규 교수

친일화하는 그룹이 힘을 얻는 상황에서는 그런 역할을 담당할 세력이 해체되면서 일진회 쪽으로 변질된 것 같음.

 

하영선 교수

결국 독립협회는 세 군데에서 다 소외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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