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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일기>4권-1
 

2003-01-22 

99년 10월 세미나 기록

 

일시 : 1999년 10월 16일 (土) 오후 3시-8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3회의실
참석 : 하영선, 최정운, 장인성, 김용직, 김영호, 손 열, 신욱희
독회내용 : <윤치호일기>4권

 


 

주요토론내용

 

하영선 교수

4권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듦. 민비의 죽음, 아관파천, 러시아 황제 즉위식 방문 등 중요한 사건이 있던 시기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던 시기임. 또한 국내 정치세력 등에 대한 평가도 재미있음. 갑오파, 갑신파, 정동파, 왕과 민비 등의 그룹들 중 대원군과 민비 간의 싸움으로 윤치호는 파악하고 있음. 윤치호의 인물 평가는 대부분 부정적임. 자기 기준이 10여년의 외국 경험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됨. 특히 러시아 방문 시 민영환의 행태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임. 또한 유길준, 민비, 고종, 박영효, 민영환 등에 대해 모두 부정적임. 그러면 우리는 안목의 수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물론 편이 다르기 때문인 이유도 있지만, 윤치호의 안목을 완전히 무시하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안목을 동시에 고려해야 할 것임(일본인들의 평가와 상황인식을 참고하기 위해 {서울에 남겨둔 꿈}, 건국대학교 출판부.를 참고하기로 함). 2권과 3권은 기독교적 생활과 심정이 묘사되었지만, 4권에 와서는 다시 1권 초기처럼 국내정치 중심의 일기가 대중을 이룸. 누구의 눈으로 복원하는가에 따라 스토리가 완전히 달라질 95-6년 2년간이 됨. 공식문건 또는 기초자료는 그에 반해 상당히 dry함. 승정원 일기도 개인적인 눈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ritual한 기록이 대부분임. 싸움의 드라마를 엿보기에는 재미있는 부분이 많음. 따라서 새로운 재구성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임. 당시 중요인물에 대한 개인적 평가도 아울러 고려해야 함.

 

김영호 교수

일본에 대한 윤치호의 입장은 어떻게 드러나나?

하영선 교수

민비는 싫어하고, 고종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애정이 있음. 그러나 민비 시해 사건 후에는 일본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 comment를 함. 즉 이 시기에는 갑오파보다는 조금 더 부정적으로 보는 듯함. 일본 문명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일 수 있지만. 한국적 이해와 관련되어서는 상당히 negative하게 보는 듯이 여겨짐.

 

장인성 교수

청일전쟁 시기보다는 상당히 일본에 대해 냉정한 입장을 취하는 듯함.

 

하영선 교수

윤치호의 국제적 안목으로 보면 당시 국내정치의 판세는 상당히 저질스럽게 보인 것으로 판단됨. 예를 들면 민영환은 자꾸 되지도 않을 것을 하라고 시킨다고 평가함.

 

장인성 교수

상당히 꼼꼼하게 cross-check해야 할 것 같음.

 

하영선 교수

예를 들어 윤치호에 따르면, 유길준은 고급 사기꾼이었음.

 

김용직 교수

윤치호가 생각하는 자신의 역할은 종교적인 역할이었던 것이 3권에서 드러나는데, 실제 자신이 뛰어들어 당시의 일을 해결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음. 그것이 dilemma였음. 이런 입장이라면 모든 사람이 부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음.

 

하영선 교수

95-6년을 복원하는 데에는 윤치호 일기가 중요성이 있을 것임.

 

최정운 교수

어쩌면 어린 왕자 같은 입장이었을까?

 

손   열 교수

당시인들의 윤치호에 대한 평가는 어떠했는가? 해외 경력을 보아 정치적인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까?

 

김용직 교수

아버지가 바라보는 윤치호는 power politics에서 이겨내기 힘든 것으로 보여졌음. 살아 남으려면 매일 방문하여 친밀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

 

하영선 교수

당시의 추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는 상당한 역할을 했음.

 

장인성 교수

비판이 당시 인물들이 실제로 그런 모습들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됨.

 

김용직 교수

왜 그런 능력이 있는 인물이 유길준이나 박영효같은 기록이나 구상을 남기지 못했는가 하는 아쉬움이 있음.

 

하영선 교수

구상은 없지만, 현실을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히 도움을 줌.

 

김용직 교수

연표와 다른 글을 통해 비교하면서 check해야 할 듯.

 

하영선 교수

유길준에 대한 윤치호의 평가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문제임.

 

장인성 교수

이 시점에서 [서유견문]은 현실정치의 장에서 별 의미를 가지지 못했을 것임.

 

하영선 교수

현장에서는 유길준이 갑오파의 핵심 브레인으로 활동하는데, 윤치호는 그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중용되지도 않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있는 듯함.

 

김용직 교수

윤치호와 서재필을 완전히 서양화된 사람으로 본다면 돌아와서 보는 한국사회는 그들에게 아주 이질적으로 보였을 것이며, 동시에 반 서양물을 먹은 사람들이 설치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이며, 동양적인 가치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을 것임. 따라서 오히려 근대와 전근대의 이분에 대해 가장 고민을 많이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됨.

 

하영선 교수

2권과 3권에서는 한국에 대한 얘기가 전혀 없었는데, 4권에서는 기독교 얘기가 오히려 몇 page밖에 없어써 대별됨. 정치 가십적인 얘기를 장황히 늘어놓음.

 

김영호 교수

윤치호 정도의 식견이면 나름대로 권력투쟁을 헤쳐나갈 기술이 있었어야 할 것인데, 그런 모습이 과연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듦.

 

최정운 교수

윤치호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여태까지 현실에 관련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일 것임. 또한 종교적인 것도 체현된 것이 아니라(즉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 아님), 단지 기독교에 매달려 보는 것이었다고 생각됨.

 

하영선 교수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면 인물평을 그렇게 비판적으로 하지 않았을 것임. 원죄임을 인정하고 애정이 있어야 했을 것임.

 

장인성 교수

한국에서의 크리스천 정치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김영호 교수

고종은 윤치호을 중용하지 않았나?

 

김용직 교수

97-8년이 되면 윤치호와 서재필이 중용되는 상황이 진행됨. 외국 생활 10년이 정치적으로는 한계가 되었지만, 보는 안목에 있어서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었음. 그리고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이었다고 보임.

 

김영호 교수

지금의 신당 논쟁도 당시와 마찬가지임.

 

하영선 교수

그 당시의 파벌 분석을 해야 꼼꼼해질 것임(유영익, {갑오경장연구} 참조). 4권을 꼼꼼히 다시 봤으면 함. 95-6년을 정치사 쪽에서 다시 한번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음. 뒤범벅된 상황과 그 해석에 대해 framework를 가지고 정리해야 함.

이후는 2000년 2월의 방일 일정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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