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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일기>1권 (국역본 상/하)
 

2003-01-22 

99년 5월 세미나 기록

 

일시 : 1999년 5월 1일(土) 오후 3시-8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2회의실
참석 : 하영선, 최정운, 장인성, 신욱희, 김영호, 김용직, 손 열, 김석근, 안인해
독회내용 : <윤치호일기> 1권 (국역본 상/하)

 


 

주요토론내용

 

독회운영방안
- 일단 [윤치호일기]를 끝내고 {신문사설모음집}으로 가는 방안. 이 경우 조선일보 측과 다소의 협상이 필요할 듯.
- 아니면, 끝내고 이승만의 [독립정신](3권)을 보고 신문으로 가는 방안
- 히라노선생의 팀이 방한할 때는 지난번에 발표하지 않으신 3분은 일단 발표하시는 것으로 합시다.
- 김옥균의 글은 [갑신일록] 외에는 별로 눈에 띠는 것이 없음.

 

하영선교수

읽은 소감으로 얘기를 풀어봅시다.

 

최정운교수

일기를 왜 썼나? 양력 1월1일부터 시작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영선교수

[갑신일록]보다 현장감이 더 좋은 듯함. 갑신정변 전후의 정황을 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임. 예를 들어 중전이 한 얘기 등은 좋은 자료가 될 듯함.

 

김용직교수

묄렌도르프가 외교를 관장할 시 실세는 민영목, 민영익이었음. 1883년 개화파들이 외교적 의례protocol등을 상당히 이해하고 있었음이 나타남.

 

하영선교수

윤치호가 푸트공사의 통역으로 들어온 정황을 보면 당시 국내에는 영어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추정할 수 있음.

 

김용직교수

그는 민영목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음.

 

김영호교수

p.253에는 사인방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나타나있음.

 

장인성교수

입체적인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는 민영익(보수파)의 자료가 필수적인데 찾기가 힘듦. 당시에 창녀가 양반으로 속여서 결혼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생김. 또한 둘째 첩은 윤치호가 상해에 있는 동안 다른 남자와 결혼했음. 그것 또한 가능한가?

 

최정운교수

일단 사대부식의 양식과는 많은 차이를 보여주는 것 같음.

 

하영선교수

윤치호일기를 읽는 이유는 첫째, 1883년과 1885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복원하는 데 상당히 기여한다는 것 때문임. 물론 편견은 당연히 고려해서 보야야 할 것임. 상해에서는 결정적인 부분이 없는 것 같고, 갑오시기는 다시 주목해야 할 것임. 
둘째, 개화의 국제정치관을 보여주고 있음. 청에 대한 비난은 격렬히 계속되고 있음. 명성황후시해 당시에는 일본에 대한 비판도 상당수 있음. 따라서 동도서기와 문명개화 사이의 스펙트럼 중에 어디에 서 있는가를 일기를 통해 꼼꼼히 따져야 할 듯함.
셋째, 국내정치 부분을 주목해야 함. 윤치호는 고종이나 중전과 자주 접했던 사람이고, 두사람에 대해 일정 정도 애정은 있었던 것으로 보임. 결국 왕의 영향력을 업고 그들을 움직이려는 의도가 보이는 듯 하나 이것 역시 잘 살펴봐야 할 것임.
넷째, 개인적인 측면(여자관계)도 살펴볼 필요가 있음.
정치학의 측면에서는 앞의 세가지 측면을 주로 고려해야 할 것임. 윤치호에 대한 연구는 별로 없음. 후반기의 친일 행적 때문에 사학계에서부터 평가를 내리는 것을 꺼리는 듯함. 그렇다고 하더라도 1910년대 이전의 부분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있음.

 

최정운교수

당시는 한 사람이 평생 같은 생각으로 살 수는 없었을 것임. 대부분이 여러 인생을 살았던 것으로 보임. 일본에서의 일기에는 '부국강병' 등에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 등장하나, 국내에 와서는 그것의 consistency가 유지되지 못하는 듯함. 그것을 잊었다기보다는 국내에서는 여러 판세에 휩쓸리다 보니 자꾸 우선순위가 밀려버린 듯함.

 

김용직교수

당시의 각 세력은 국내정치적으로 기반이 있다기보다는 외교적인 왕래(통역 등)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 같음. 그러나 민씨 집안은 국내정치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음.

 

김영호교수

국내 일부 세력이 공사의 힘에 대해 너무 과장하는 느낌을 받았음.

 

장인성교수

문명을 보는 기준이 조금 드러남. (더럽고, 잔인하다는 표현과 '인의'와 '잔혹'의 차이로 문명을 설명하고 있음) 정치개혁의 근대적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별다른 얘기가 없음. 영국의 인도지배를 옳다고 평가하는 일기도 있음(89년 5월26일). 이것은 후에 제국주의를 수용하게 되는 단초로 보임. 이념의 얘기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후쿠자와의 학문적인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음.

 

하영선교수

1884년에 들어서서는 군사개혁, 재정개혁이 불가능함을 느끼게 되면서 민문계열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자리잡음.

 

손   열박사

결국 방법론이 없었던 것 아닌가? 개혁의 수순을 못찾은 것 같음.

 

하영선교수

윤치호는 무력을 쓰기에는 당시가 좋은 타이밍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음. 왕을 설득해서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임. 윤치호아버지(윤흥렬)가 realistic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병력을 양성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임. 궁극적으로는 병벌끼리의 충돌인데, 당시로서는 힘든 일이었음.

 

최정운교수

김옥균은 박정희, 전두환 식의 쿠데타를 상정했던 것 같음.

 

김용직교수

푸트, 김옥균, 윤치호의 진언 중 푸트의 비중도 컸을 것임.

 

하영선교수

푸트는 그렇다고 하여도 미국무부 쪽은 한국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음. 결국 짝사랑의 상황이 계속된 것 같음. 군사훈련 부문에서도 결국 민간인으로 퇴역 장성 몇 명만 오게 되는 상황이었음.

 

김영호, 김용직 교수

한국에 대해서는 미국이 policy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임. 결국 고종은 나라를 체계적으로 개선할 아이디어가 없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음.

 

최정운교수

그러면 민씨 일가도 그런 것이 없었을까? 그리고 민영익은 왜 보수로 선회하였을까?

 

하영선교수

민영익은 일본을 개화의 모델로 상정하지 않았던 것 같음. 또한 그는 민씨의 대계보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음. 결국 민씨일가는 자신들이 권력을 잡고 점진적으로 개선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임. 즉 나라가 망하는 것과 민씨가 망하는 것 사이에서 우선 순위를 후자에 둠.

 

최정운교수

민영익의 입장에서 집안도 구하고 나라도 구하는 방법이 없었을까?

 

하영선교수

그러려면 개화를 품었어야 하는데, 개화 쪽에서 보기에 그런 프로그램으로 나라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상황.

 

최정운교수

공식직함은 6품(교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도 개화의 거두로 대우했을 정도로 인정은 받고 있었음.

 

하영선교수

민영익연구도 중요한데, 윤치호보다 더 연구가 없음.

 

김영호교수

일기를 통해 세상은 잘 보이지 않는 듯함.

 

장인성교수

당시의 dominant쪽은 안보이는 상황이기 때문에 당연함.

 

최정운교수

그렇다면 왜 일기를 썼을까 하는 질문을 다시 해보아야 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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