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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매천야록>, 황현 저, 김준 역(교문사, 1996)
 

2003-01-22 

98년 8월 세미나 기록

 

일시 : 1998년 8월 29일(토) 오후 3시-8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회의실
참석 : 하영선, 최정운, 장인성, 신욱희, 김영호, 김용직, 박찬승, 김석근
독회내용 : 완역<매천야록>, 황현 저, 김준 역(교문사, 1996)

 


 

주요토론내용

 

이념보다는 행태를 가지고 개화파를 비판(인성론?). 개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닌 듯함.

 

당시 황현이 구상한 조선왕조의 방향은?
- p.267의 이설의 상소와 p.203의 신정희의 고종에 대한 답 등에서 나타나는 '지도자의 덕목'에서 유추해볼 수 있음.
- 대안은 이홍장과 원세개의 얘기 등에서 등장함(고종의 퇴출?). p.195의 한러밀약사건과 연관됨.
- 러일전쟁 당시의 감각은 p.557에 나타남: 인종전쟁의 시각이 강하게 배어있음.
- 사실 부분은 자세하게 언급되기도 함(김옥균 살해 장면). 홍종우에 대한 평가는 다소 긍정적임. 소문 또는 신문을 근거로 쓰여진 부분은 과장된 측면도 많음. 정상적인 일을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임.
- '만국공법'에 대한 인식은 철저하지 않으나 p.441 등에서 이를 소개하고는 있음.
- 민비의 행태를 보면 개인의 권리에 대한 관념이 전혀 없음이 드러남.
- 독립협회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p.429, 433, 459에서 드러남.

 

이태진 선생의 '고종 재평가'에 대해서 사학계에서도 상당한 반론이 있음.
- 특히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부분에서 궁내부와 탁지부이 예산은 비슷한 규모인데, 왕실의 위엄을 높이는 데 많은 예산을 소모함.
- 즉, 역으로 보면 왕실의 권위가 떨어졌다는 얘기가 됨.
- 당시의 시급한 과제였던 교육에 투자되는 예산은 전체의 2%인 반면, 국방예산은 20% 수준이었음. 갑오경장 때 전국적으로 열렸던 소학교는 2년 내에 거의 폐교되었고, 유학생 경비도 거의 끊어짐.
- 문제는 관료체제 자체의 무력화라고 볼 수 있음. 고종은 관료보다 환관(궁내부 장악)을 더 신임하게 됨.
- 고종, 대원군, 민비의 세 권력축을 고려할 때, 당시 대원군 권력의 약화는 가능한 제일 좋지 않은 방향이었을 수 있음.
- 반론: 고종이 전혀 생각이 없지는 않았음. 단, 정책화되지 않은 것은 한계였음(윤치호일기 참조).

 

황현은 보는 시각이 윤치호와 대조적이기에 보이는 측면이 아주 다름.
- 황현이 잘못된 것으로 본 것은 당쟁과 리어십이었음. 개화는 애초에 평가하지 않음.
- 진정한 의미의 유학의 정통성이 끊어지는 상황에 대한 아쉬움이 강한 듯함.
- 인성론(품성론)이 주 테마였을 수 있음: 더 이상의 미래는 없다.
- 지조있는 재야지식인으로서의 평가와 황현의 안목을 통해 보이는 19세기의 모습 사이의 괴리는 존재하고 그 한계는 인정해야 함.
- 인편을 통한 정보가 자료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음.

 

이 시기의 복원 문제
- 1차 공문서가 보여주는 모습(실록)은 평이함: 사건이 없음.
- 개화파는 기록이 별로 없고 소략함.
- 재야지식인의 기록(황현)도 다소의 문제가 있음.
- 따라서 상당히 빈 공간이 있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 사학계와 사회과학계가 논의해야 할 필요가 존재.
- '황성신문'은 비슷한 문화를 공유한 개신유학자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유학자들에게 독립신문보다는 거부감이 훨씬 덜했을 것임. 단 옛것과 개화 둘 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구례에 칩거하면서 이런 류(자신의 얘기는 없고, 분절적인 형식의 글)의 글을 쓸 수밖에 없었음.
- 정치사, 외교사 측면에서는 재해석해야 할 부분이 많으나, 사회, 문화사 측면에서는 참고할 내용이 상당수 있음.
- 황현이 '전파'가 일어나는 시기의 특징적 징후를 보여주는 지도 모름: 변괴 얘기가 자주 등장하고, 니힐리즘과 유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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