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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1899.10-1899.12.4)
 

2003-01-22 

98년 5월 세미나 기록


일시 : 1998년 5월 30일 (土) 오전 10시-오후 2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1회의실
참석 : 하영선, 최정운, 장인성, 신욱희, 김영호, 안인해, 이성형, 김석근
독회내용 : 독립신문 1899년 10월 -1899년 12월 4일

 


 

주요 토론내용


독립신문 후속작업은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각각 범주별로 뽑고 그것을 논의해서 정리하는 방식으로
-처음에는 시기별로 잘라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2배수로 뽑아서 논의하는 방식

 

10월 5일자(p. 578)
-Balance of Power의 기회를 이용해야 한다고 얘기함

 

비스마르크, 워싱턴, 솔즈베리 등에 대한 소개가 있음
-애국계몽기에는 이러한 영웅사관이 보편화하였지만, 당시는 러일전쟁 5년전이었음
-1899년에 이런 언급이 처음 나온 것인가?

 

백인종·황인종의 관계(황인종의 연대)
-이것도 러일전쟁 시기에는 일반화함. 이 시기에 이런 얘기가 나온 ㄱ서이 좀 특이한 것 같음
-아관파천 후 일본을 좀더 우호적으로 보고 인종얘기를 통해 플어나감

 

청국에 대한 비판을 일반적으로 등장함

 

아시아에 대한 인식 등장: 인도, 미얀마, 베트남 등
-오히려 애국계몽기에는 이런 여력이 없었음
-결국 인종 대결의 틀 속에서 미얀마, 베트남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을 것임

 

일본은 황인종의 모범으로서 협동의 대상으로 인정함(11월 9일자, p. 693)
-11월 16일(p.718)에는 물론 일본의 행위에 대한 비판도 함
-그 내용은 순치지국인데 아시아를 위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
-p.717은 아라사와 일본이 식민지 배포 문제로 공론이 분분하다는 내용. 그렇다면 당시의 국제적 현실 사정을 알았다는 얘기인데, 상대적으로 너무 느긋하다는 느낌이 듦. 개탄으로 끝냄. 일본 경계를 얘기하는 대표적인 sample 중의 하나임.

 

국내파트는 점차 톤이 약해짐
-청에 대해서는 비판을 넘어 불쌍하다는 투였으며 그런 대국이 어떻게 망할 수 있었는가?
-일본에 대한 인식이 잘 나타난 p.717-8등이 1899년 상황에서 보편적 인식이었는가? ;  삼아의 관념이 아닌 식민지화의 속셈을 빨리 벗어나야 하지 않는가?
-청·일에 대한 딜레마: 문명개화와 국제정치의 딜레마인가?
-그것은 문명개화의 모델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임

 

이중적 평가가 가능함
-긍정적 측면에서는 세력균형의 세계대세를 인식한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청이 제거된 후 일본을 어떻게 잡으려고 했는가 부분에 대한 인식은 나이브했다는 한계가 있음
-부정적 측면에서 친일적이었다고 단정하기에는 간헐적으로 엿보이는 일본비판이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대한 경계를 드러냄
-사회사적인 측면에서 독립신문의 백미는 내부, 즉 민의 계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임

 

일본에 대한 평가 자체가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을 것임. 심정적으로 일본은 러시아보다는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었을 것임
-친일이라고 매도하기는 힘들 수 있겠지만 동북아 정세의 추이를 파악하지 못한 점. 즉 불과 5년 후의 을사보호조약을 예견하지 못한 점은 문제가 됨
-위정척사를 제외하고 문명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일본을 완전히 제외시킬 수는 없었을 것임
-개별국가에 대한 인식은 security관념을 어떻게 가지고 있었는가에 따라 국가별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 같음

 

스펙트럼의 문제
-갑오파와 갑신파 그리고 동학을 상정하고 볼 떄, {독립신문}은 갑오와 갑신보다는 일본에 대해 덜 positive 하면서도 의병이나 동학보다는 일본의 역할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음.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negative 한 측면을 지적하려고 함
-을미사변을 겪고 나서는 모델로서의 일본은 평가하되, 일본에 대한 저항은 이미 갑오 이후에 형성되었다고 봐야 할 것임
-즉 딜레마는 있지만, 이미 불안감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강도는 이전보다 약할 수도 있음
-위정척사는 문명을 제외시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일을 강하게 주장함

 

문명, 국내, 국제의 3개 차원으로 구분해서 보면 애국계몽기 이후의 흐름도 볼 수 있음
-다만 독립신문 쪽은 이 세 가지를 다 보려 하기 때문에 위정척사보다는 논리적으로 명확하지 못함
-또한 안과 밖의 논리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음. 즉 일본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
-초기의 독립이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면 그러한 독립에 일본이 일정 정도 기여했다고 보여지기 때문에 일본을 적개념으로 규정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임
-즉 전체적으로 전략적 사고(적에 대한 이해_)는 부족했다고 지적해야 함
-왜 전략적 사고가 부족했는가 하는 원인을 보다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음

 

alliance하려면 국가 내부가 unity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파벌이 나뉘어짐. 따라서 민 base로 접근하려는 것임. 척사파는 민심의 동요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함
-실학에서는 토지와 세금문제는 주요 토대로 생각하는데, 왜 {독립신문}에서는 그런 관념들이 잘 보이지 않는가?
-부가 뒷받침되어야 강병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볼 때, 안에서 긁어내어 부국강병은 난망한 일이었을 것임. 결국 차관문제도 제기됨.
-내부 재정의 개혁을 위해서는 지주를 혁파해야 하는데, 당시 지도층 대부분이 지주 출신이었기 떄문에 불가능

 

조선에 대한 평가 : patrimonial state vs modern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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