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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록연구회 10월 정례모임
 

2011-10-22 

2011년 10월 세미나 기록

 

일시: 2011년 10월 22일(토)

발표: 김수암, 북학과 박제가의 연행 : 교류 통상과 공간인식의 확산




주요 토론내용


● 김현철 코멘트


1. 박제가의 수레, 통상 등에 대한 인식이 최고 융성기를 맞이한 18세기 말 청의 상황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가?

2. 비슷한 시기에 기득권층 인물이 연행갔다면 박제가와 인식을 공유할 것인가?

3. 박제가의 구상에서, 19세기의 주요 문제들(서양문물수용론, 영선사 등 청으로의 유학생 파견안 등)이 제기된 것을 볼 수 있는데, 18세기 조선 분위기에서 얼마나 현실성 있는 정책안이었을까?


● 김수암 답변


1. 건륭제 시기가 청의 융성기임에는 분명.

2. 서장관 등의 공식 보고서에서 청과의 통상을 주장하기는 어려웠을 것. 박제가의 개혁안은 전통적인 조청관계 틀과 연속성도 있고 단절되는 모습도 보이는데, 실현 가능성 문제는 박제가 자신도 고민했으리라고 생각.

3. 영선사는 청에 체류하면서 기술을 습득하는 것인 데 반해, 박제가의 구상은 연행사절과 함께 다녀오는 것이므로 어느 정도는 전통질서의 틀을 수용하면서 실천적 방안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음.


● 전재성 코멘트


발제문 9페이지에서 인용된 박제가의 말 “역대의 임금께서는 중국어를 익히도록 명을 내리셔서 朝會를 하는 자리에서 우리말의 사용을 금하는 팻말을 설치하기도 하셨고 백성들에게는 중국말로 소송에 임하기도 하셨다. 이러한 시책이 단순히 사절 사이의 통역에 필요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나의 생각으로는 장차 큰 일을 하고자 해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말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었다. 현재에는 중국어를 오랑캐가 지껄이는 조잡한 말로 간주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에서 ‘장차 더 큰 일’이란?


● 수암 답변


아쉽게도 앞뒤 문맥에 구체적으로 나온 바는 없음. 전란시 국가기밀 교섭 등을 염두에 두고 중국어 습득이 긴요함을 말했다고 봄.


● 하영선 코멘트


다산, 연암, 초정 박제가의 포지션의 차이를 부각시켜야 함. 그리고 전체적으로 초점을 하나로 모아주어야 함. (존주론과 북학변 사이의 긴장-충돌에서 초정의 포지션은 무엇이며, 다산, 연암과 어떻게 다른가?)


1. 연행을 4번 간 초정의 북학의에 따르면, 조선을 중국으로 만들고 싶다고 주장. 초정(서얼), 연암(경화사족), 다산(명문가이지만 남인)은 모두 사회적 신분이 다름. 정조 측근이었던 다산에게는 ‘큰 일’이라고 하면 정말 국가적 차원일 테고, 연암은 어쨌든 기득권층에 속해 있는 데 반해, 검수관에 불과했던 초정으로서는 국가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할 기회가 요원함. 초정의 존주론과 북학변은 그 내용상 충돌함. 존주론에서는 설사 북벌한다고 해도 20년은 일단 북학을 하고 나서 싸우자는 주장. 북벌과 북학의 스펙트럼에서 초정의 입장은 연암, 다산과는 다르다고 봄. 다산의 요동론 같은 경우, 소중화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권역을 넓히겠다는 정조적 전략 있음.


2. 초정의 재부론. 일본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나가사키 교역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조선도 중국에 해외통상을 허가받아야 한다고 주장. 생산성 증가와 교역 문제. 사회경제사 연구자들이 자본주의 맹아론 관점에서 초정에 대한 기존 연구 꽤 했기 때문에, 이 부분을 국제정치학적으로 재구성할 필요 있음. 결국, 존주론과 북학변 사이에서 중국에 대한 초정의 입장과 연결시켜서 재부론을 바라보고, 입체화.


● 김수암 답변


초정이 사대부의 청 인식을 비판할 때에는, 단순한 이용후생을 넘어서는 국내 신분질서 개혁 의지가 있었다고 봄. 경제를 바꾸려면 북학을 해야 하고, 북학은 결국 국내 정치-사회제도를 바꾸게 된다는 논리.


● 하영선 코멘트


그렇다면, 챕터 구성이 크게 세 가지로 가긴 하겠는데, 논리적으로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예를 들어 초정과 백동수 관계에 있어서는, 과거제 개혁이 중심 논의가 되는데, 이것은 어디에 집어넣을 것인가? 국제정치학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 경제학이 나오고, 그 다음이 정치질서를 바꾼다로?

(1) 존주론 vs. 북학변

(2) 경제학

(3) 정치학


● 김성배 코멘트


기존 조청관계와 초정의 통상론은 상충되는가? 중국이 적극적으로 조선의 통상을 막았는가, 아니면 조선이 스스로 소극적이었는가?


● 김수암 답변

초정의 입장은, 조선이 소극적이었다는 것.


● 김봉진 코멘트


만약 조선이 중국에 통상을 요청했다면, 중국이 막지는 않았을 것. 문제는, ‘조공체제’라는 정형화된 시스템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각 나라마다 대청관계의 양상이 다르고, 청조측에서도 상당히 탄력적으로 이를 운용하는 모습. 기존에 ‘조공체제’라는 용어를 사용한 하마시타 다케시 선생의 경우, 조공체제=조공관계(=대사관계)+호시관계(=영사관계)의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초정의 주장은 호시관계를 우리에게도 달라는 것. 조선이 요청했다면 중국이 허가하지 않았을 이유가 없음.


● 하영선 코멘트


지금 지적이 중요함. 하마시타가 연구서에서 밝혔듯, 18세기에 이미 동아시아에는 무역관계가 상당히 형성되어 있음. 조선도 연행사절을 이용한 사무역은 상당히 성행. 그런데 왜 이것을 공식적으로 전면화시키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을 국제정치학적으로 밝힌 연구는 없는 듯.


● 김봉진 코멘트


결국 국내에서 청을 멸시하는 존주론 때문이라고 봄.


● 김수암 답변

교역과 북벌론 중간 지점에서 박제가가 고민.


● 김봉진 코멘트


박제가는 명확하게 해외통상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연행록 저자들 중 독보적임. 더구나 그 범위가 유구, 안남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국제정치학적 서술에 적합한 대상이라고 봄.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박제가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은데, 이것이 정책화되지 못한 것이 오히려 의문. 이러한 주장에 대한 정조의 입장이 궁금함.


● 하영선 코멘트


초정이 나가사키 교역을 얼마나 정확히 알았으며, 그것이 대중관계와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밝혀주는 IPE적 접근이 적합하겠음. 다만, 국내정치와의 관련성을 서술하는 데 있어서 서얼이라는 사회적 신분이 개혁성향으로 얼마나 이어질는지 의문인 것이, 초정이 시를 많이 남겼는데, 그 시의 내용을 보면 매우 시시콜콜하고 다정한 성격이라 혁명가-행동가로서는 부적격.


● 김봉진 코멘트


시를 써도 혁명은 가능. 투사는 아닐지언정 그 생각 자체는 충분히 혁명적. 그렇다면 이러한 아이디어를 정책화시킬 최종결정자로서 정조의 진취성과, 노론을 정조가 어떻게 컨트롤했는가의 문제로 수렴. 정치행위를 규율하는 지배언설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고 생각.


● 김수암 답변


1786년 정조에게 올린 병오소회에서는 서양인을 초빙하자는 말까지 하는 걸 보면, 박제가를 비롯한 백탑파 전체가 매우 급진적.


● 하영선 코멘트


그렇다면 논문의 구성은 대략 아래 네 챕터.

(1) 북학변과 존주론

(2) 통상론

(3) 박제가의 통상론에 대한 동아시아 차원에서의 IPE적 해석

(4) 서얼, 과거제도 등 사회신분적 차별에 대한 국내 개혁안


● 김수암 답변


초정의 통상론에 대해서는 전통 조공질서 속에서 주로 보려고 했는데, 오늘 논의를 통해 동아시아 차원에서 국제정치경제적으로 접근해야겠다고 생각을 확장.


● 하영선 코멘트


하마시타는 오히려 후자에 너무 치우쳐있는 감이 있음. 양자를 균형감 있게 서술.


● 김봉진 코멘트


일본의 나가사키 관리무역은, 비록 직접적인 무역주체는 상인들이지만 막부가 관리하여 이익을 수취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확충시켰고,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침. 조선도 무역항 하나만 개시해도 파급효과가 클 수 있었음. 나가사키가 1570년에 개시. 교역의 대표적 물품인 도자기의 경우에 한국에 기술력과 생산력이 있었음에도, 중국에서 수출 중단했을 때 한국을 건너뛰고 일본 나가사키로 상권이 이동. 결국 초정의 주장은 조선에도 이러한 거점을 만들자는 것인데, 우리는 왜 나가사키같은 항구가 개발될 수 없었는가? 조선과 일본의 차이가 무엇인가? 일본의 경우 나가사키(데지마)에 네덜란드라는 global power가 들어온 것이 단초가 되었고, 중국에 따로 허가를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중국과 교역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선 국내에서 정책결정한 뒤 예부에 통지했으면 중국은 당연히 승인했을 것. 조선이 망설인 데에는 임진왜란의 트라우마가 컸다고 봄.


● 김수암 답변


초정의 통상론의 주된 상대는 청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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