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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국제정치 큰일났다
 

중앙일보 

2005-03-25 

국제정치가 흔들리고 있다. 흔들림의 강도가 심상치 않다. 큰일 난 것은 우리의 불감증이다. 지진의 충격파가 무섭게 밀려오고 있는데도 무감각한 것이다. 우리는 19세기 제국주의.식민지, 20세기 냉전.탈냉전시대의 구식 측정기로 21세기 지진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변화하는 한.미 관계, 한.일 관계, 북한 핵 문제를 구태의연한 발상으로 풀어 보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일요일 노무현 대통령은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을 면담하면서 현안을 강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정치학 교수 출신의 라이스 장관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강의를 들었을까. 그가 취임 이후 반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은 21세기의 애치슨이 되겠다는 것이다. 애치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 재편 과정에서 미 국무장관으로서 한국이 빠져 있는 애치슨 라인을 선언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라이스 장관은 9.11 테러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21세기 애치슨 라인인 라이스 서클을 선언하고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세계를 자유민주주의 동맹, 자유민주주의 전환과도국, 폭정 전초기지라는 세 개의 자유의 동심원으로 다시 짜보려는 외교 노력을 세기사적 노력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자유의 동심원 지진파는 이미 동북아에 밀어닥치고 있다. 21세기 중국의 부상을 불안하게 느끼고 있는 일본은 발 빠르게 자유의 동심원 핵심 서클에 가입하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 중국은 조화로운 경제 성장을 계속하기 위해 미국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는 화평굴기(和平起)를 강조하고 있다. 북한은 현재 동심원의 주변 서클로 분류돼 있다. 노 대통령은 며칠 전 육군3사 졸업식에서 한국은 동북아시아의 균형자 역할을 할 것이며 앞으로 우리의 선택에 따라 동북아의 세력 판도는 달라질 것이라고 연설했다. 이러한 구상은 변화하는 동북아 판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동북아는 더 이상 냉전 시기의 남방 삼각과 북방 삼각관계의 대결구도를 보여 주고 있지 않으며, 아직까지는 미국과 중국의 본격적 대결구도도 아니다.

 

동북아 국력 구조를 읽기 위한 가장 간단한 지표로 국내총생산과 군사비를 보자. 미국은 10.9조/4500억 달러, 일본은 4.3조/430억 달러, 중국은 1.4조/300억(비공식 600억)달러, 러시아는 0.4조/170억 달러, 북한은 0.02조/18억(비공식 50억) 달러, 그리고 한국은 0.6조/170억 달러다. 초등학생 수준의 간단한 덧셈과 뺄셈을 할 줄 안다면, 현재로서는 우리가 동북아의 균형자 역할을 하거나 세력 판도를 바꿔 놓기 어렵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가 우선해야 할 일은 동심원의 핵심 서클과 중간 서클을 거미줄로 칭칭 감는 동아시아의 거미 역할이다.

 

동북아에 새로운 자유의 동심원이 그려지기 시작하는 가운데 한국과 일본은 독도와 교과서 문제를 포함한 역사전쟁을 본격화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외교적으로 단호하게 대응하고, 국제 여론과 일본 국민을 설득해 역사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이런 국내외 여론 동원 수준의 전략으로 일본의 사고와 행동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21세기 힘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보다 세련되고 효율적으로 근대적 힘과 탈근대적 힘을 함께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근대적 힘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한 서클에 있는 미국을 활용하는 게 필수적이다. 탈근대적 힘의 동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일 근현대사의 지식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세계 수준의 장기적 연구 투자가 우선해야 한다.

 

자유의 동심원 지진은 마지막으로 북핵 문제에 밀려올 것이다. 천신만고하여 6자회담이 재개되더라도 현재로서는 베이징 기본합의가 불가능하다. 결국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북한의 핵 위협과 미국의 자유 전파의 대결 속에서 북핵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는 중국이다. 따라서 자유의 동심원 방식으로 북핵 문제가 풀리는 경우 한국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현재와 같이 한.미 관계, 한.일 관계, 북핵 문제를 시대착오적으로 대응해 나가면 21세기 한반도는 동북아의 균형자가 아닌 소외자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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