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act    
[시평] 역사의 갈림길에 서서
 

중앙일보 

2005-01-01 

새해가 밝았다.

 

덕담으로 한 해를 시작해야 할 오늘, 나는 꼭 100년 전의 오늘을 곰곰이 되돌아보고 있다.

 

1905년 1월 1일.

 

100년 전의 신년 새해는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에는 운명의 한 해로 밝아 왔다. 1904년 2월 초 일본해군이 인천과 여순 앞바다에서 러시아해군을 기습함으로써 20세기 동아시아의 운명을 결정한 러.일 전쟁은 시작됐다. 1905년 1월 1일 여순항의 러시아 수비대가 항복함으로써 전세는 일본으로 기울어진다. 일본은 3월의 봉천대회전과 5월의 대한해협 해전에서 승리하고 9월 초에는 러시아와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메이지유신(1868) 이래 새로운 문명표준인 부강국가를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온 일본은 러.일 전쟁을 계기로 드디어 20세기 국제무대의 떠오르는 별로 등장한다. 반면 영국과 함께 동아시아 무대의 주역이었던 러시아는 무대 뒤로 물러서야 했다. 한국은 나라의 죽음을 피해보려는 국내외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11월 일본의 강요된 을사조약을 통해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2005년 1월 1일.

 

경제는 어렵고 정치는 한심하다. 안에서 과거를 위해 싸우고 있는 동안 세계는, 그리고 동아시아의 미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국은 다시 한번 역사의 선택 앞에 서 있다. 21세기 동아시아 무대는 새로운 모습으로 꾸며지고 있다. 20세기 냉전의 세계질서를 소련과 함께 주도했던 미국은 21세기에도 다시 한번 주인공으로서 동아시아 무대에 서고 있다. 그러나 연기의 내용은 바뀌고 있다. 냉전의 동맹 대신 반테러와 변환(transformation)의 신동맹질서를 동아시아에서도 짜나가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변환의 신동맹이다. 미국은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그물망(ubiquitous network)을 짜기 시작했다.

 

일본은 21세기를 위한 역사적 선택을 했다. 미국과 함께 동아시아의 u-그물망 짜기를 시작한 것이다. 21세기 중국의 부상을 심각하게 걱정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발표한 21세기 신방위력대강은 일본의 고민을 잘 보여주고 있다. 21세기 일본은 19세기 못지않게 한반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 최근의 배용준 신드롬도 이런 국제 정치경제적 배경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중국도 선택을 끝냈다. 2002년 16차 당대회에서 솔직하게 밝힌 것처럼 2020년까지 중국의 최우선 목표는 현재 개인소득 1000달러, 국민총생산 1조3000억달러 수준의 국민경제를 현재와 같은 고도성장을 유지하여 개인소득 4000달러, 국민총생산 6조억달러 규모의 소강(小康)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20세기 선(先)경제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한편 북한은 21세기에 강성대국을 건설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19세기 부강국가론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21세기 한국의 선택은 어렵다. 미국.일본과 함께 21세기 동아시아 u-그물망 짜기 동맹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 미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심각하게 중국의 부상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다고, 20세기 경제대국 중국을 선택하면, 미.일 주도의 신동맹질서의 주변을 서성거리게 될 것이다. 그 여파는 우리의 삶 전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될 것이다. 만약 두 갈림길 대신에 북한과 함께 자주의 왕국을 한반도에 건설하려 한다면, 우리의 21세기는 고난의 장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장정의 끝은 강성대국이 아니라 약쇠소국(弱衰小國)이다.

 

21세기 한반도의 살길은 정부가 강조하고 있는 협력적 자주국가가 아니라 매력국가의 건설이다. 지정학적으로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제국들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으면 소극적인 자주의 길 대신 적극적인 매력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한국형 u-그물망 짜기와 7000만의 배용준화에 우리의 살길은 숨겨져 있다.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