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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안보 위기를 피하려면
 

조선일보 

2004-06-10 

21세기에 20세기 논리라니

유사시 힘 빌릴 '신용' 필요

 
▲ 서울대 하영선교수 
 
불안하다.


서울에서 열린 한·미 간 주한미군 감축 협의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솔직한 심정이다. 기우(杞憂)일까. 럼즈펠드 미 국방부 장관은 지난 4일 싱가포르에서 가졌던 라운드 테이블 토론에서 주한미군의 이라크 차출과 조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뼈 있는 답변을 했다.

 

앞으로 부딪힐 가장 어려운 일은 어떻게 20세기 사고(思考)를 중단하고 21세기 사고로 문제를 풀어 나가느냐라는 것이다.

 

감축 협의 테이블의 한·미 간에는 20세기 탈(脫)냉전과 21세기 변환(transformation)의 논리가 충돌하고 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이 충돌의 깊은 의미를 우리 정치 지도자, 정책 실무자 그리고 신문·방송, 시민사회 모임들이 놓치고 있다는 점이다.

 

협의 직후 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주한미군 감축안, 일방 통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미국이 제시한 감축안은 어디까지나 개념 계획이며, 따라서 감축안이 확정적 결론이라는 전제하에 대응책 마련을 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지적은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고 있는 것이다.

 

럼즈펠드 국방장관을 비롯한 미국 고위 군사당국자들의 해외주둔 미군에 관한 최근 공식 발언들을 조심스럽게 해체해 보면 주목할 만한 내용과 만나게 된다. 미국의 감축안이 개념계획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변환의 논리에 기반한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 원칙은 21세기 그물 중심 전쟁론의 대부인 세브로스키(Arthur K. Cebrawski) 전 제독이 이끄는 군사력 변환실(Office of Force Transformation)의 지난 3년간 노력에 크게 힘입어 이미 구체적 내용을 갖추고 있다. 남은 것은 세부적 협상과 지역적 특수성의 고려 정도이다.

 

더 불안을 느끼게 하는 것은 재배치의 기본 원칙이 대단히 21세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20세기 냉전 논리의 극복을 21세기 진보라고 자부하는 우리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21세기 변환의 논리로는 ‘감축 협의’가 아니라 ‘유동 협의’다. 20세기의 해외주둔군 시대는 막을 내린 것이다. 감축시기, 규모, 내용은 20세기만큼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미국은 세계 금융시장처럼 ‘세계 안보시장’을 꿈꾸고 있다. 세계 안보시장의 위기 정도를 끊임없이 측정해서 가장 믿을 만하고 국가 이익이 많이 나는 곳에 수시로 안보력을 투자하고 회수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단 유사시에 보다 중요한 것은 안보력을 빌릴 수 있는 신용력이다.

 

20세기 탈냉전의 꿈을 꾸고 있는 동안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성큼 다가온 21세기 변환의 현실은 ‘신용 군사사회’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대응은 19세기 자강(自强)의 논리나 20세기 탈냉전의 논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주 국방’을 강조한 노무현 대통령의 지난해 8·15 경축사나 ‘협력적 자주’를 강조한 최근의 현충일 추념사가 우리의 문제 인식 수준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라는 네 제국에 둘러싸여 있는 비(非)제국 분단 한반도는 한반도, 동북아, 지구의 유사시 위기를 자강의 논리로만 극복하기는 불가능하다. 돌려막기 수준의 세력균형 발상으로도 안 된다.

 

21세기 한반도 생존번영 전략은 21세기 국제정치 질서의 원시성 때문에 여전히 스스로의 노력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무리한 자강의 원리는 북한의 선군주의(先軍主義) 비극에서 보듯이 역설적으로 죽음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현재 중국이나 일본 제국이 취하는 신중함에서 보는 것처럼 한반도도 정치적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범위 내에서 미국을 비롯한 지구 ‘신용 군사’를 생존 전략에 최대한 활용하면서, 동시에 21세기 변환국가로 성장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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