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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2003년 한반도는 답답하다
 

중앙일보 

2003-12-30 

2003년의 역사 무대가 막을 내린다.

 

한 해 동안 시평을 쓰면서 무엇보다 소중했던 것은 2003년의 독자였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소중했던 것은 1903년의 독자였고, 2103년의 독자였다. 역사의 그네를 탈 줄 모르는 연기자는 무대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2003년의 연기자가 무대의 중심에 서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1백년 전의 과거를 돌아보고, 1백년 후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백년 대계를 기획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 새 역사 코드 못읽은 참여정부

 

1903년의 독자들 눈에 비친 2003년의 한반도는 불안했다. 국난의 정치가 반복되는 것은 아닌가 해서다. 1903년 제야의 종소리는 불과 두 달 후에 벌어질 러.일전쟁의 개전을 예고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일본은 20세기 초 역사 무대의 떠오르는 별을 넘어서 동쪽에 떠오른 태양이 되었다. 반면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할 만한 국내외의 힘을 마련하지 못한 한국은 무대에서 쫓겨나는 국망(國亡)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국망의 비극은 역사적 우연이 아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의 지도자들은 재빠르게 국민 부국강병 국가건설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표준을 따라 잡았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역사의 코드 읽기에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역사의 무대는 제국주의의 치열한 각축장이 됐다.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나라가 외세를 활용할 줄 아는 지혜도 없다면,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국내 역량은 하나로 결집되기보다 끊임없는 분열과 갈등을 계속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 왔을 때, 이미 무대에서 우리의 역할은 지워졌다.

 

국망의 비극을 코앞에 두고 있는 1903년 독자들의 눈에 2003년이 불안해 보였다면 무슨 이유일까. 2003년의 새 정부는 21세기 새로운 역사의 코드 읽기에 실패하고 있다. 19세기의 자강(自强)과 균세(均勢), 20세기의 탈권위주의와 탈냉전이라는 구시대의 연기로 21세기의 새로운 무대에 서려는 용기를 보여 주고 있다. 새로운 역사의 코드에 맞지 않는 연극이 국내외 관객을 잃어버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새로운 문명 표준을 창조적으로 도입해 실천에 옮기려면, 21세기 제국다루기의 묘법을 깨쳐야 한다. '대한제국'의 발상으로 21세기 제국을 다루면, 의도와는 달리 자주 대신에 종속의 결과를 촉진할 것이다. 국내역량의 결집도 노무현 대통령의 표현대로 시민 혁명 차원에서 추진한다면 또 하나의 비극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선 치르듯이 5년의 혁명기를 거치고 나면, 오늘의 지역갈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허허벌판의 찢어진 산하를 보게 될 것이다. 21세기의 4대 제국에 둘러싸인 '대한제국'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할는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2103년의 독자들 눈에 비친 2003년의 한반도는 답답하다. 한반도의 지도자들이 21세기 1백년 역사의 주인공.무대, 그리고 연기 내용을 제대로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21세기 미래 역사는 이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19세기에는 국민 국가라는 주인공이 부국과 강병의 무대에서 일국 중심의 국가 이익의 극대화를 연기했다.

 

*** '무명 영웅'국민을 두려워해야

 

20세기에는 일국 중심의 부강전략이 가져온 공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 안과 밖의 이익을 보완적으로 고려하는 안보와 번영 무대를 꾸며 보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부강국가와 안보번영 국가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동시에 그물망 지식국가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첫 출발은 자주와 외세, 보수와 진보라는 구시대적 구분을 거미줄로 칭칭 감는 노력이다. 다음으로는 안보.번영 무대와 함께 지식.문화.환경 무대에 복잡한 그물망을 쳐야 한다.

 

2003년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이 땅의 정치인들은 정신차려야 한다. 2003년 정치의 엉망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2004년 새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무명의 영웅'인 우리 국민의 부지런함 때문이다. 제발 우리 정치인들이 '내 탓이로소이다'라는 뼈아픈 반성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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