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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자주 - 동맹 논란은 비극이다
 

중앙일보 

2003-11-18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의 방한과 함께 우여곡절을 거듭하던 한국군의 이라크 추가 파병 내용이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추가 파병 내용이 난항을 겪어온 것은 표면적으로는 재건지원 비전투병 중심이냐, 아니면 치안유지 전투병 중심이냐 하는 파견 부대의 성격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난항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문제는 훨씬 심각하다. 왜냐하면 파병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져 온 정부 내의 입장 차이가 '자주파'와 '동맹파'의 갈등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 이라크 파병이 안풀리는 까닭

 

문제가 심각한 것은 단순히 부처 간의 입장 차이 때문이 아니다. 입장 차이의 구분이 '자주파'와 '동맹파'라는 구시대적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 국망(國亡)을 초래해 이미 용도 폐기된 지 오랜 이분법의 망령으로 21세기를 살아 갈 수는 없다. 19세기 중반 개화세력은 조선의 새로운 생존 전략으로 중국에서 벗어나서(自主), 근대 서양 모델을 받아들일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한편 수구 세력은 중국과 사대형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양 세력을 배척했다. 19세기 국론 분열은 결국 외세를 활용하지 못하고 외세에 활용당해 나라가 망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변화하는 국제 질서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국내 정치의 주도권 싸움에 더 골몰했던 정치 세력들은 동맹과 자주를 함께 품어 보려던 유길준의 '양절론(兩截論)'이나 김윤식의 '양득론(兩得論)'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역사의 비극은 반복될 위험성을 보이고 있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세계 질서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남북 대결과 남남 분열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라크 추가 파병 문제를 19세기형의 '자주파'와 '동맹파'의 갈등 속에서 바라다보고 풀어 나가려 한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관념 속의 자주이고, 현실 속의 타주(他主)일 뿐이다. 21세기는 더 이상 자주의 세기가 아니다.

 

탈냉전 이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조차 아프가니스탄전이나 이라크전 같은 반테러전을 자주가 아닌 공주(共主)의 입장에서 치르려는 치열한 노력을 하고 있다. 21세기 자주의 천문학적 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리하면 제국으로서의 미국은 위기에 봉착할 것이다.

 

중진국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아직까지도 낙원의 법칙이 아닌 정글의 법칙이 우세한 21세기 세계질서의 숲 속에서 자주의 명분은 엄청난 자주의 정치.경제.군사.정보.문화적 비용을 요구한다. 비용 계산에 빠른 나라가 일본이라면, 늦은 나라가 북한이다. 우리는 비용이 든다는 것조차 뒤늦게, 그나마 대단히 제한적으로 배우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21세기에 '자주파'의 실험은 비극이다. 제2의 북한을 자초할 뿐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동맹파'인가? 아니다. 20세기 냉전형 '동맹파'나, 21세기 초 제국형 '동맹파'의 대안에는 21세기 동맹국들이 함께 숨쉴 수 있는 공간이 너무 좁다.

 

*** 대통령 리더십으로 돌파하라

 

21세기 '공주파'의 등장이 절실하다. 21세기 유길준과 김윤식의 시각에서 국내의 갈등을 수렴하고, 한.미 간의 갈등을 풀어나가야 한다. '자주파'는 이라크 추가 파병의 비자주적 결정이 수반할 수 있는 우리 젊음의 죽음을 강조하고 있다. '동맹파'는 또 다른 죽음을 걱정하고 있다. 이라크 추가 파병의 자주적 결정이 현실적으로 지불해야 할 자주의 총체적 비용이 나라를 서서히 시들어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제국의 동맹국.적대국, 그리고 경계국의 차별은 가혹할 만큼 철저하기 때문이다. 우리 젊음과 나라의 삶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대안은 죽음의 자주가 아닌 삶의 자주에서, 죽음의 동맹이 아닌 삶의 동맹에서 찾아야 한다. 그 첫 출발은 대통령이 강력한 지도력을 기반으로 더는 눈치보지 말고 '자주파'와 '동맹파'의 구시대적 논란을 21세기 '공주파'의 새로운 안목으로 돌파해야 한다. 역사의 시계는 용기없는 자를 기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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