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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지식과 권력의 잘못된 만남
 

중앙일보 

2003-10-07 

'송두율 사건'이 우리 사회에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반도의 냉전, 한 지식인의 비극, 지식과 권력의 올바른 만남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케 한다.

 

이번 사건은 한반도의 냉전상태를 재확인해 주고 있다. 세계는 이미 탈냉전을 넘어 21세기의 새로운 질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아직도 추운 냉전의 땅이다. 한반도에서 남북이 출연하는 모든 무대의 밑바닥에는 남북의 치열한 정치전이 자리잡고 있다. 경제 무대도, 지식 무대도, 문화 무대도, 체육 무대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건도 정치전이 주도하고 있는 지식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한반도 냉전이 낳은 송두율 사건

 

이러한 비극적 현실을 극복하는 길은 현실 자체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냉엄한 현실을 철저히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꿈만 키워 나간다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꿈이 아니고 비극적 현실이다.

 

냉전처럼 격렬한 정치전이 주도하는 지식전의 무대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지식인들은 스스로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기대와 달리 역사의 현실 속에서 정치 무대의 찬조 출연을 넘어서지 못해 왔다. 지식이 정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획득하고, 더 나아가 영향력을 획득하려면 엄청난 혜안과 더불어 고도의 도덕성을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는 끊임없이 지식인을 권력과 금력의 세계로 유혹한다. 한번 덫에 걸리면 다시 자율성을 회복하기 어렵다. 한반도 7천만명에 기여하는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는 형극의 도덕성을 필요로 한다. 노동당원의 자격으로 한반도의 남과 북을 동시에 품는 '경계인'이 될 수는 없다. 더 나아가 '경계인'은 남쪽의 민주화.번영화와 마찬가지로 북쪽의 민주화.번영화를 함께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사건처럼 지식과 권력이 비극적으로 만나지 않고 건강하게 만날 길은 없는 것인가. 권력은 정통성과 효율성을 위해 끊임없이 지식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정보기술 혁명의 영향 속에서 21세기는 지식국가의 세기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지식이 구체적인 실천의 장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권력의 무대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따라서 지식과 권력은 상호 보완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끊임없이 지식을 종속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성공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권력은 어떻게 가능할까.

 

우선 필요한 것은 지식과 권력의 생산적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지식인이 끊임없이 권력에서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동시에 정치권력이 지식인을 종속화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지식과 권력은 상호 보완적 상승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북한의 지식 무대는 주체사상의 강화와 함께 눈에 띄게 빈곤해져 왔다. 1970년대 이전의 논문집 정약용(62년)이나 김옥균(64년)과 같이 한계 안에서나마 의미있는 연구를 70년대 이후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북한 정치 주도세력이 지식 무대의 정치적 종속을 심화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의 지식 무대도 민주화와 함께 보다 풍요로워져 가고 있는가를 깊이 자성해야 한다.

 

*** 상호 타락의 악순환 막으려면

 

권위주의 시대에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던 지식인들이 미래의 보다 나은 한반도를 위해 정치권력과 얼마나 건강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편 오늘의 정치 무대는 또 한번 지식인들을 일회용 단역으로 소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지속적 자기 성찰이 없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는 상호 타락하는 악순환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송두율 사건'은 단순한 한 지식인의 비극만이 아니다. 한반도 냉전의 산 현장이다. 그리고 지식과 권력의 잘못된 만남이다. 제2의 사건을 막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지식과 정치 무대에 서있는 모든 연기자들의 뼈아픈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반도의 21세기 미래는 어둡다.

 

하영선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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