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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북핵’ 새 흥정카드 될 수 없어
 

조선일보 

2002-10-18 

아시안게임에 참석했던 북한 응원단의 화려한 모습이 우리의 기억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심상치 않은 북한 핵개발 의혹 문제가 새삼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지난 10월 초 제임스 켈리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이 1994년의 제네바 기본합의를 어기고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우라늄 농축 계획을 갖고 있다는 미국의 주장을 인정했다는 내용의 성명을 뒤늦게 발표했다.


아직 부시 행정부의 성명에 대한 북한의 공식 대응이 알려지지 않은 시점에서 문제의 성격과 전개 방향을 읽어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문제의 잠재적 심각성 때문에 제한된 정보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제대로 읽고 해결책을 찾는 노력은 불가피하다.


우선 지난 10월 켈리 특사의 방북 직후 북측의 반응을 주목해야 한다.


북측은 회담 이후 외무성 대변인 성명이나 조선중앙통신 논평 등을 통해 켈리 특사의 ‘오만한’ 태도를 강하게 비난하면서 북·미 회담은 대화재개 문제를 논의하는 대신에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을 정확히 알 수 있게 한 ‘유익한 계기’가 됐다고 비꼬는 투의 지적을 했다.


켈리 특사에 대한 북한의 솔직한 논평은 놀랄 만하다.


왜냐하면 부시 행정부의 ‘악의 축’ 외교를 제대로 읽고 있는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켈리 특사의 방북이 대화재개 문제 논의가 아니라, 대화재개 조건의 공식 통고를 위해 이루어질 것으로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북·미 회담을 ‘제2의 제네바 협정을 위한 예비회담’으로 잘못 파악했다면 문제는 대단히 심각하다.


제네바 기본합의는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얻기 위한 영변의 핵시설을 동결하는 대신에 미국의 경제·정치·군사적 대가를 받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북한이 ‘제2의’ 제네바 기본합의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지난 9·17 북·일 정상회담의 4항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만으로는 부족하다.


국내외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미국이 강력하게 요구하는 영변 핵시설의 과거 행적을 밝힐 수 있는 핵사찰을 받아들이거나 또 하나의 새로운 흥정카드를 만들어야 할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 핵사찰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상 미국으로부터 확실한 경제·정치·군사적 생존보장의 담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무장 해제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입장에서 보다 나은 대안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제2의 제네바 기본합의를 이룰 수 있는 제2의 카드를 마련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만약에, 미국이 주장하고 북한이 시인했다고 알려지는 우라늄 농축 시설이 이러한 제2 카드의 역할을 위해 등장한 것이라면, 문제는 대단히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북한은 지난 북·미 회담을 통해 미국의 대북 강경 적대시 정책을 명백하게 확인하였으므로, 선군(先軍)정치의 원칙에 따라서 필요한 대응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북·미 관계의 전망은 대북 적대시 정책을 추진하는 미국의 태도 여하에 달려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북한의 이러한 벼랑끝 전략이 1990년대의 클린턴 행정부 당시에는 제네바 기본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으나, 2000년대의 부시 행정부에서는 또 다른 결과를 얻어낼 수 없다는 데 있다.


부시 행정부가‘악의 축’ 외교의 핵심으로서 대량살상무기 테러를 미국 안보의 최대 주적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핵무기 개발 능력은 더 이상 협상 대상이 아니고, 선제 공격의 대상이 될 뿐이다.


따라서 만약 북한이 1990년대의 사고로 2000년대의 대안을 모색하여 우라늄 농축시설을 제2의 제네바 기본합의의 협상카드로 삼으려는 것이라면, 상황은 긴박하다.


우리 정부로서는 북한이 부시 행정부의 ‘악의 축’ 외교를 제대로 파악하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동시에 미국이 북한으로 하여금 북한 핵개발 의혹에 대해서 대량살상무기 테러의 국내 안보차원을 넘어선 해결책을 찾도록 유도해야 한다.


하영선/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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