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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테러 전쟁과 정의
 

중앙일보 

2001-12-06 

9.11테러 이후 이에 대한 대응으로서 탈레반 정권의 붕괴와 오사마 빈 라덴의 체포 또는 사살을 목표로 하는 미국의 대테러 전쟁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탈레반 정권의 붕괴가 임박해오고 빈 라덴의 추적이 가시화됨에 따라 빈 라덴을 비롯한 9.11 테러용의자들을 체포시에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미국 국내외에서 본격화하고 있다.


*** 비밀 군사재판 회부 논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미 연방 검사총회에 참석해 테러용의자들을 일반 공개법정이 아닌 군사법원의 비공개 재판에 회부하는 것이 미국의 국가안보이익에 기여한다고 판단하면 미국은 그렇게 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미국의 자유를 파괴하려는 외국의 적들이 미국의 자유공간을 활용하도록 다시는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대표적 고급일간지인 뉴욕 타임스는 '찌그러진 정의:전쟁과 헌법'(11월 2일)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만약 부시 행정부가 빈 라덴을 비롯한 9.11 테러주모자들을 비밀군사재판에 회부한다면 행정부는 입법부의 권한을 침해하고, 사법부를 무시하는 것이며, 국제인권과 지구정의의 옹호자로서의 미국의 위상을 격하시키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9.11 테러주모자들의 재판절차 논쟁은 단순한 사법적 논의가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논의다. 이러한 논의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간집단의 폭력사용에 대한 현실주의.평화주의, 그리고 정전(正戰)주의라는 서양의 지적 전통에 대한 초보적 이해가 필요하다.


현실주의의 눈에는 폭력은 원칙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개별국가들이 놓여 있는 현실적 국제정치 상황 속에서 그들의 국가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 폭력의 사용은 불가피한 것으로 비치고 있다.


평화주의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도 폭력의 사용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상대방의 폭력도 폭력이 아닌 사랑에 의해 비로소 극복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사랑의 논리는 폭력의 논리와 달리 상호적이 아니고 일방적이며, 나의 존재의 부정을 통해 상대방의 존재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여서 상대방 스스로가 나의 뜻을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정전주의는 현실주의와 평화주의의 입장대신 전쟁의 수행목적과 수단의 정당성에 근거해 폭력의 옳은 사용은 인정하고, 폭력의 옳지 않은 사용은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정당한 전쟁, 정전의 조건으로서 폭력의 사용에는 상대방의 불법 행위와 그에 대한 시정 거부와 같은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폭력의 사용이 무차별하고 지나치게 이뤄지지 않도록 차별성의 원칙과 비례성의 원칙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부시 행정부가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현실주의와 평화주의를 넘어서서 21세기 정전주의의 대테러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가 9.11 테러 주모자의 사법처리계획에서와 같이 좁은 의미의 현실주의를 추진하는 경우에는 미국 내의 여론분열과 국제적 호응의 약화 속에서 미국의 대테러 전쟁은 난관에 봉착할 것이다. 한편 미국이 근대 국제정치의 기본 골격을 유지한 채 평화주의를 선택하는 경우에 기존 국제정치 질서에서 불공정하게 대우받고 있다고 인식하는 정치집단은 쉽사리 대외 정책수단으로서의 테러를 포기하기 어렵다.
*** 민 ·군목표 철저히 구분을


미국이 21세기 정전주의로서의 대테러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어야 한다. 목적의 정당성을 위해서는 테러를 줄이기 위한 방어전쟁이어야 하며, 외교 차원에서 테러원인의 명분을 제공하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수단의 정당화를 위해서는 대테러 전쟁의 수행과정에서 군사목표와 민간목표를 철저히 구분하는 차별성의 원칙과 원인보다 결과적 피해가 작은 비례성의 원칙을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


부시 행정부가 구축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대테러 세계질서는 좁은 의미의 국가이익에 기반한 군사작전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정전론에 기반한 도덕적 우위성을 국내외에서 확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河英善(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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