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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교사와 국제정치학 : 한국국제정치학 바로세우기
 

2003-02-17 

하영선 (서울대) · 김영호 (성신여대)

 

I. 서 론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과학의 독립 분과로서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국제정치학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영국 주도의 "외교사 있는 국제정치학"에서 미국 주도의 "외교사 없는 국제정치학"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탈냉전의 세기사적 변화와 함께 미국국제정치학계는 외교사와 국제정치학의 재결합을 조심스럽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국제정치의 주인공을 비롯한 출연자들이 무대 위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를 조심스럽게 관찰하여 역사의 흐름을 읽으려는 노력 대신에, 자연과학적 논리실증주의에 기반하여 국제정치의 기본원리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탈냉전의 변화 속에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냉전이라고 불리는 국제정치의 무대 위에서 국가라고 불리는 주인공들의 활동원리를 현실주의 또는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찾아내려던 노력이 탈냉전 이후의 복합화되어가고 있는 행위자들이 복합화된 무대 위에서 보편과 특수가 복합된 연기를 보여주는 새로운 현실을 무시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9.11 테러와 이에 따른 오사마 빈 라덴이 주도하는 지구적 그물망의 테러 조직과 미국 주도의 지구적 대테러 조직의 대결은 탈냉전 국제정치학의 자기성찰을 가속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9.11 테러 이후의 세계정치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근대국제질서의 비역사적 추상화를 넘어서서 복합화된 무대 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연기자와 구조의 역사적 동태를 조심스럽게 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국제정치학은 구미 국제정치학과 비교해서 더욱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구미 국제정치학은 역사적 접근이나 비역사적 접근이나 넓은 의미에서 자신들의 국제정치적 삶의 추상화와 연관되어 모습을 갖춰왔다. 그러나 한국 국제정치학은 구미 국제정치학을 완제품으로 수입하거나, 수입 가공하여 한반도의 국제정치 삶을 분석하려는 초보적 노력을 기울임에 따라,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국제정치 행위자와 구조의 근대적 일면을 조명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중국 중심의 전통질서, 일본 중심의 지역제국주의 질서, 미·소 중심의 냉전질서, 미/일과 중국 중심의 21세기 질서가 역사적으로 복합되어 형성된 행위자와 구조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구미 중심의 근대국제정치적 삶에 기반한 국제정치학의 수입완제품이나 수입가공품이 한국 국제정치현실을 생동감 있게 드러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것이다.

 

스스로 체험해 온 역사적 현실의 기반 위에 세워지는 국제정치학을 위한 자기반성은 구미지역보다도 한국에서 더욱 절실하다. 한국 국제정치학이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서양의 근대 국제정치질서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19세기 중반 이래 우리의 삶이 어떻게 국제정치적으로 형성되어 왔는가를 조심스럽게 밝혀야 한다. 이러한 노력 위에서, 한반도 국제정치의 주인공들의 사고와 활동이 보여주는 전통, 근대, 탈근대의 복합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한국 국제정치학을 바로 세우기 위한 첫출발로서 한국외교사를 본격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국제사회 행위자들의 교섭에 관한 역사를 문서를 기반으로 복원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한국외교사 연구가 골동품 수집의 취미를 넘어서서 한반도 중심의 우리들의 삶을 제대로 풀어나가기 위한 한국 국제정치학의 뿌리내림을 위한 한국외교사연구가 되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미래사를 위한 한국외교사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미래의 표준에서 과거를 읽는 잘못을 범하라는 것이 아니라, 코젤렉이 『미래의 과거』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과거 속의 미래를 찾아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외교사가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삶의 안과 밖의 동학을 체계적으로 들어내서 한반도 미래사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현재와 미래의 역사적 전망 속에 한국외교사의 연구 주제가 선정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1962년에 나온 동주 이용희의 『일반국제정치학(상)』이 근대국가의 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1994년에 나온 『미래의 세계정치』는 똑같은 시기의 유럽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연합 형성에 관심이 모아져 있다. 이러한 경우 근대국가 형성 부분을 인위적으로 축소하고 국가연합의 전통을 인위적으로 확대해서 역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갈등하고 있었던 여러 현실들 가운데 미래지향적으로 역사를 들여다 보고 문제를 설정한다는 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외교사가 과거와 현재, 나아가 과거와 미래의 접목을 시도하는 학문분야라면, 외교사 연구자는 분석 대상의 현실을 생성사의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오늘의 국제정치 구조 속에서 행위자들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양식은 전통의 기반 위에 19세기 중반 이래 구미 중심의 근대와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 속에 중첩되어 있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복수의 시제를 염두에 두고 행위자와 구조의 상호작동관계를 드러내려고 하면, 단순히 전통과 현대를 이분법으로 대비시키는 수준의 연구를 넘어서서, 서양의 근대가 동양의 전통 속에 전파·변용되는 과정을 생성사적으로 추적해야 한다.

 

셋째, 한국외교사가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복합적으로 품어야 한다면, 공간적으로 세계, 동양, 한국을 동시에 품어야만 한다. 따라서 한국외교사, 동양외교사, 세계외교사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19세기 이래 동아시아에 형성되었던 국제사회의 구조는 세계 수준의 영·러의 대결, 지역 수준의 청·일의 대결이 중첩되는 속에 한반도의 국제정치적 위상이 결정되는 모습을 띄고 있다. 따라서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구성원들이 경험하는 "밖"의 공간은 복합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국외교사는 한국세계정치사로 인식하고 불러야 할 것이다.

 

넷째, 한국외교사는 단순한 대외교섭사가 아니라 19세기 유럽문명의 근대적 삶을 따라 잡으려는 우리 나름의 삶의 총체사의 대외적 노력으로 분석돼야 한다. 19세기 중반 이래 전통적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는 구미 중심의 근대국제질서와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화의 복합적 영역에서 새로운 만남을 겪게 된다. 따라서 한국외교사도 이러한 총체적 만남의 일부로서 재구성돼야 한다.


II. 19세기의 한국외교사

 

중국 중심의 전통적 천하질서에서 살아왔던 조선이 19세기 중반 유럽 중심의 근대국제질서를 만나서 자기 나름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려는 시도와 좌절의 역사 속에서 특히 시급하고 주목해야 할 연구주제로서는 만국공법의 도입, 세력균형외교, 일본 동양평화론을 우선적으로 들 수 있다.

 

만국공법의 도입사는 단순히 법과 제도의 전파·변용으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통과 근대의 복합화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는 초기 사례로서 중요하다. 이광린, 김용구, 김효전, 김세민 등의 선행연구로 도입시기와 경로 및 의미에 대한 기본 검토는 이루어졌다. 위정척사파의 거부론에서부터 동도서기파의 활용론을 거쳐, 개화파의 수용론에 이은 현실론의 과정은 한국 근대국제정치의 사고와 행동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므로, 보다 본격적 국제정치학적 분석을 필요로 하고 있다. 1880년대 우리의 국제정치인식과 활동수준을 만국공법을 통해서 조명해 본다면 동도서기적 입장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건에 대해 만국공법을 활용하고 있으며, 유길준은 힘의 경쟁으로 세계를 인식하면서도 양절체제의 한 축인 구미 열강들 속에서 만국공법의 도움을 기대하는 자유주의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으며, 갑신정변을 겪은 박영효는 1888년 상소문에서 만국공법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현실주의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거부론, 활용론, 수용론, 현실론에 대한 보다 심층적 국제정치학적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19세기 조선의 생존전략으로서 만국공법의 실효성이 희박해짐에 따라, 개화세력들은 근대 국제정치의 생존수단으로서 폭력에 주목하는 현실주의적 대안을 모색하게 된다. 그러나 19세기 조선은 외세와 충분히 맞설만한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 자국의 생존을 도모해 보려는 세력균형론이 추진된다. 1880년대에서 1890년대에 걸쳐 세력균형을 통해 자국의 생존을 꾀한 시도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국제정치학적으로 조심스럽게 재구성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의 세력균형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망국의 국제정치를 겪게 된다. 한반도 세력균형 좌절의 역사는 미래사의 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신중한 국제정치학적 검토를 필요로 한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됨에 따라 한국은 더 이상 세력균형의 가능성이 사라진 속에 국망(國亡)의 국제정치라는 비극적 체험을 겪게 된다. 반면에 일본은 일본의 아시아주의의 20세기 초 발현형태라고 할 수 있는 동양평화론을 주장하게 된다. 21세기 동아시아 지역협력문제를 성공적으로 풀어야 하는 한·중·일 3국은 20세기 동양평화론의 형성과 지역제국주의론으로의 전개, 그리고 한국과 중국이 일본의 동양평화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내용에 대한 국제정치학적 연구로부터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작업에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III. 식민지 시대의 한국외교사

 

식민지 시대 한국외교사 연구는 국가없는 외교사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은 주권의 상실로 인하여 공식적인 국제정치 행위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이 시기 한국외교사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의 국제정치"와 주권회복을 위한 우리 민족의 "독립의 국제정치"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시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구분에도 불구하고 일본제국주의와 열강들에 의한 "식민의 국제정치"가 국제정치 행위자로서의 부활을 추구한 "독립의 국제정치"를 압도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는 한국외교사의 세계외교사적 측면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이 시기 한국외교사 연구는 일본제국주의 외교정책의 압도적인 영향력에 비추어볼 때 일본제국주의의 특징에 대한 분석에 기초하여 일본의 식민지 조선 정책에 대한 특수성을 밝히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본측 사료에 대한 광범위하고 세밀한 분석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의 국제정치적 위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지면서 이 시기 한국외교사의 복원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복원 작업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일방적인 정당화 혹은 비난의 차원을 벗어나서 객관적 이해와 연구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또 다른 열강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독립의 국제정치"가 갖는 뚜렷한 한계점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기 한국외교사는 국가의 부활을 위해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국가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베스트팔렌조약 이전의 네덜란드는 엄연히 영토와 주민을 갖고 있었지만 국가로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함으로써 국가성을 획득하지 못한 예이다. 이와 달리 식민지 조선은 영토와 민족은 존재했지만 주권을 인정받지 못함으로써 국제정치적 행위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예이다. 따라서 주권을 인정받기 위한 국내외의 외교적 노력은 일본제국주의로부터 심각한 방해 공작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대한 분석은 식민지 시기 한국외교사를 세계외교사와 국제정치이론과의 밀접한 연관 하에서 복원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또한 인정을 받기 위한 외교적 노력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념적으로 분열된 국제정치현실에서 각각 소련과 미국으로부터 외교적 인정과 물질적 지원을 받으려는 국내외 독립운동세력들의 시도로 인하여 독립운동전선에 심각한 분열을 초래했다. 이러한 분열은 일본 제국의 붕괴 이후 독립운동세력의 외교적 인정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상이한 태도에 의해 더욱 증폭되었다. 소련은 체제의 성격상 공산세력 중심의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한 반면 미국은 민주적 절차에 의해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민주세력을 인정한다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해방 이후 임정과 이승만 세력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표면화되기 이전까지 미국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사실은 해방 이후 전개되는 한국외교사는 식민시기 한국외교사와의 연속선상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제국주의라고 하는 외적 존재에 의한 우리 민족에 대한 피구속성이 극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기에도 한반도 내에서 생활을 영위한 우리 민족은 하나의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국제정치적 단위체의 복원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이 점에서 3.1운동과 국내정치세력들의 국제정세관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는 식민지 시기 국내의 우리 민족이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어떻게 식민지 내적 삶을 영위해 왔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한국외교사 연구를 독립운동사의 차원을 넘어서는 총체사적인 차원으로 한 단계 진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3.1운동과 뒤이어 성립된 임시정부는 한반도에 전략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던 주변 열강들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인식에 일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데 기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외교사는 여전히 일본과 주변 열강의 이해관계에 의해 압도당하는 현실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측면을 갖고 있다. 식민지 시기별로 변화하는 열강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의 변화 과정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 요인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분석하고, 이러한 변화 과정에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량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는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 분석을 통하여 세계외교사의 한 부분으로서의 성격이 명확해지는 식민지 시기 한국외교사의 복원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IV. 냉전 시기의 한국외교사

 

냉전 시기 한국외교사 연구가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점의 하나는 지나치게 2차 자료 내지는 해설서 위주의 연구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탈냉전 이후 이미 냉전사 연구는 공산권의 문서 해제로 인하여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되고 있다. 냉전 시기 등장한 외국의 연구서들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우리 나름의 객관적 시각에 기초하여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또 다시 서구의 새로운 냉전 연구서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함으로써 이 시기 한국외교사 연구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세계적 조류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는 여전히 이념적 성격이 강한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라는 이분법적 성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국무성이 외교문서집을 공간하는 것과 달리 한국 정부 수립 이후 외교부는 일부 홍보용 책자들만 내고 있을 뿐 공식 문서조차 문서집의 형태로 발간하지 않고 있다. 선전적 측면이 강한 북한의 문건들은 제쳐두고라도 우리의 경우 미국측의 판단과 자료에 근거하여 무조건 '미국 따라하기' 식의 사고에 젖어 있기 때문에 1차 자료와 2차 자료의 편차에 대한 인식도 거의 없고 일종의 "루머의 외교"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외교사 연구는 자료와 시각의 문제를 동시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이중적 과제를 탈냉전 시기에 안고 있다.

 

냉전 연구의 최근의 경향은 냉전 기원에 관한 전통주의적 해석과 수정주의적 해석이 안고 있던 문제점들을 새로운 사료들을 통하여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일정한 합의점을 찾아나가고 있다. 스탈린이 세계공산혁명의 청사진을 갖고 팽창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냉전이 발생했다고 주장한 전통주의적 해석은 새로운 사료들에 의해 비판을 받고 있다. 스탈린은 공산주의 이념에 의해 자신의 대외정책 결정에 실질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공산혁명의 청사진을 갖고 있지는 않았고 유럽에서 미국과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상호불신이 싹트면서 미소 냉전이 격화되었다는 것을 최근의 자료들은 보여주고 있다. 그 구체적인 계기는 1947년 6월 미국이 추진한 유럽경제부흥정책인 마샬플랜이었다.

 

또한 미소 냉전은 자본주의체제의 유지와 확대를 추구한 미국의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수정주의자들의 경제적 해석은 최근의 자료들에 의해 비판을 받고 있다. 마샬플랜과 일본에 대한 경제적 지원 등과 같이 미국이 경제적 수단들을 동원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러한 수단들은 미국의 안보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했다. 또한 미국과 소련 체제가 갖고 있는 상이점에 때문에 양국이 모두 전후에 제국적 질서를 창출했지만 미국은 "초대받은 제국"을, 소련은 "강요된 제국"을 창출했고, 그 결과 소련은 제국적 질서 유지의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몰락했다. 이처럼 탈냉전기 냉전 해석은 냉전 발발의 책임을 미국과 소련의 어느 일방에 돌리기보다는 양국이 처한 객관적 국제정치적 위치에서 오는 일종의 안보딜레마를 강조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탈린의 안보에 대한 기대 수준은 개인적 차원, 소련공산당 차원, 소련 국가안보 차원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매우 높았고 이것이 양국 사이의 안보딜레마를 증폭시킨 결과를 낳았다고 보고 있다. 냉전 시기 한국외교사 연구도 냉전 기원에 관한 최근의 새로운 연구들을 적절하게 수용하면서 균형잡힌 시각 하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냉전 시기 한국외교사 연구의 시각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사실은 구한말, 식민지 시기와 마찬가지로 한국외교사의 세계외교사적 측면이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식민지 조선의 국제정치 행위 주체로의 복원 과정을 살펴보면 여전히 국제정치적 요인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와의 전쟁에 참여한 열강들의 전중 회담에서 신탁통치의 형태로 식민지 조선의 복원 작업이 입안되었다. 실제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이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이 안을 구체화시켰다. 소련은 공산세력 중심의 통일전선전술을 통해서 3상회의의 입장에 대한 동의를 북한 내부에서 이끌어냈지만, 미국에 의한 남한 내부에서의 좌우합작을 통한 신탁통치 구상은 심각한 저항과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1946년말 이승만은 미국을 직접 방문하여 좌우합작의 무력화와 단일정부 수립을 미국 정부에게 강력하게 요청하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1946년과 1947년 각각 2차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는 1947년 6월 유럽에서의 마샬플랜의 시행과 함께 본격화되기 시작한 미소 냉전의 영향을 받아서 실패하고 만다. 미국에 의한 한반도 문제의 유엔 이양과 소련의 독자적 북한 정권 수립 시도는 한반도에 반쪽의 두 개의 행위자의 등장으로 귀결되었다. 

 

한반도의 분단 과정은 미소 사이의 냉전적 대립과 국내정치세력 간의 권력투쟁과 이념투쟁이 중첩되는 양상을 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정치세력의 행동 반경은 외세가 설정한 범위에 의해 제약받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지 시대보다는 대외적 환경이 나아졌다고는 하더라도 남북한에 성립된 냉전형의 분단국가에 대한 국제정치적 힘의 규정력은 더욱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규정력 하에서 분단국가는 남북한 사이의 상호작용과 주변 열강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지구상에 등장한 어떠한 국가들보다도 독특한 냉전형 행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외교사가 이러한 상호작용에 대한 역사적 고찰없이 일방적으로 서구적 국제정치이론틀을 분단사의 형성과 전개과정에 덧씌운다면 냉전기 한국외교사 연구는 뚜렷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대결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신현실주의와 같은 서구의 국제정치이론은 유럽 냉전의 종식과 한반도 냉전체제의 지속이라는 시차적 불일치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 뚜렷한 한계점을 갖고 있다. 한반도 냉전체제는 남북한 행위자가 냉전 구조와 각각 어떻게 상호작용해 왔는지를 구체적인 문서들의 추적을 통해서 살펴볼 때 비로소 그 윤곽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분단 이후 남북한이 상호작용한 냉전 구조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지역 강대국과 미국과 소련이라는 세계적 차원의 초강대국들과의 관계가 중층적으로 얽혀 있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처럼 한반도 냉전의 형성사와 전개과정에 대한 외교사적 연구없이는 한반도 냉전체제 해체의 정책적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냉전 대결의 장기화로 인하여 더 이상 냉전 구조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게 된 소련이라는 행위 주체가 내적 개혁과 동구에 성립된 소련 제국의 축소를 통하여 냉전 구조에 적응해 나가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실패하고 붕괴함으로써 비로소 미소 냉전체제는 붕괴하게 되었다. 무정부성이라든지 핵무기에 기초한 물리적 군사력의 분포상태라는 구조적 요인은 변화가 없었지만 소련이라는 행위 주체의 소멸과 함께 냉전체제는 해체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냉전체제는 남북한이라는 냉전형의 행위 주체가 세계적 차원의 냉전 구조의 영향 하에서 형성되었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냉전 구조의 규정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북한은 서구국제정치이론의 가정으로 등장하는 추상적인 국가들과는 달리 독특한 냉전형의 국가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 특징은 결코 선험적으로 정의될 수 없고, 냉전 시기 한국외교사의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한국전쟁과 최근의 핵 개발 시도에서 보는 것처럼 북한은 한반도 냉전 구조를 타파시키려는 현상변화적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에 남한은 미국과 함께 현상유지적이고 한반도 냉전 구조에 순응하는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냉전체제 해체의 정책적 방안으로서 냉전형 행위 주체의 변화보다는 한반도 냉전 구조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정책은 한반도의 냉전을 또 다시 열전화시키는 잘못을 범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은 중국의 공산화에 의한 동아시아 지역 질서의 변화가 북한의 무력 통일 욕구와 맞물리면서 세계적 차원의 냉전 질서의 형성과 전개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공산혁명 성공으로 인해 유럽보다 훨씬 더 유동적인 상황이 전개되면서 지역적 세력균형이 공산세력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판단한 소련은 중국의 동의 하에 북한의 무력통일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지만 미국의 강력한 개입과 저항에 직면하여 휴전을 통한 한반도 분단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한반도 냉전체제의 변경을 위한 시도가 결코 남북한 당사자의 차원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은 한반도 차원, 동아시아 지역적 차원, 세계적 차원의 냉전사를 동시적으로 한국외교사가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또한 한국전쟁의 사례는 한반도 냉전체제의 해체과정이 전쟁의 방식이 아니라 남북한에 의한 평화적 방식의 합의에 의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지역적, 세계적 차원에서의 주변 열강들의 이해관계와 일치하지 않을 때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인식은 한국전쟁 이후 전개된 한반도 냉전 질서의 형성과 전개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고찰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


V. 결론

 

구한말, 식민지 시기, 냉전 시기에 대한 통시적 분석을 통해서 볼 때 한국외교사는 세계외교사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과 같이 강대국의 경우 자기들이 '하는' 외교사로서 세계외교사라면, 우리의 경우 '당하는' 외교사로서의 세계외교사라고 할 수 있다. 국제정치 공간에서 작동하고 있는 행위 주체들은 사실상 그 국력이나 역할에 의해 각각 겪고 있는 현실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치이론은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추상적인 차원에서 모든 국가들에게 생존의 원칙 같은 것을 제공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한국외교사의 경우처럼 구체적인 시공간에서 실제적으로 작동할 때에는 일정 부분 변용될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수준에서 국제정치학적 원칙이 있다고 해도 동아시아 지역에 들어오면서 변모가 이루어지게 마련이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적 변형을 거치게 되므로, 자연과학적 공식처럼 기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은 굉장히 제한되어 있다. 원칙과 예외, 현실주의와 자유주의 등이 어떻게 배합되어 재구성되느냐 하는 설명은 한국외교사 없이는 곤란하다. 따라서 국제정치학의 보편성은 한국외교사의 구체성과 만날 때 훨씬 생동감 있는 분석과 실효성 있는 전망을 일구어낼 수 있다. 따라서 한국국제정치학이 구미국제정치학의 추상론에 그치지 않는 유용한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행위 주체와 구조가 형성되고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외교사 연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국외교사 연구에 기초한 한국국제정치이론 정립 작업은 장기간에 걸친 사료의 검토 작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작업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흔히 구미의 국제정치이론을 수입하여 우리 현실에 맞게 적용하면 될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하게 된다. 토양이 다른 곳에서 자라난 구미의 이론을 토양 형성사에 대한 이해없이 무작위적으로 우리의 현실에 이식하려는 시도는 기대하는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국제정치 현실의 역사적 토양이 형성된 시기의 기원을 19세기로 보는 것은 서구의 근대국제정치질서에 의한 충격에 의해 조선이 처했던 동양적 질서가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형의 구체적인 모습은 전통과 현대라는 양분법이 아니라 전통적 질서가 서구의 근대적 질서를 만나서 착종된 복합화된 양상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구한말, 식민지 시기, 냉전 시기 전체를 통시적으로 살펴보려는 한국외교사적 노력은 바로 구미 국제정치이론의 보편적인 틀이 한반도라는 시공간에서 복합화의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 변용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보려는 시도이다.

 

한국외교사와 한국국제정치이론 연구에 미치는 세계외교사와 구미 국제정치이론의 압도적 영향력에 비추어볼 때 독자적인 한국국제정치이론의 모색은 어떻게 보면 매우 어려운 이론적 작업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미국 중심의 국제정치적 위계 질서 하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정치를 일종의 드라마에 비교하면 그 행위 주체들의 역할과 비중에 따라서 주연, 조연, 엑스트라로 위계적으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이다. 특정 시기의 국제질서의 성격과 문명의 표준은 주연의 역할을 하는 강대국에 의해 제시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경우 이러한 표준을 학습하고 그 질서에 순응해 가는 데 만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위계 질서 하의 사고나 행동양식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가 국제정치질서와 문명 표준의 생산 구조 및 그 역사적 변화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의식하면서 한국외교사 연구를 통하여 독자적인 한국국제정치이론을 정립해 나간다면 우리의 한국외교사도 '당하는' 외교사가 아니라 진정한 세계외교사의 지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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