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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의 평화개념도입사
 

2003-02-11 

사대와 교린을 기반으로 하는 중국적 천하질서에 오랫동안 익숙해 왔던 한반도는 19세기 중반 전쟁과 평화를 기반으로 하는 유럽의 근대국제질서와 새로운 만남을 겪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만남의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우세한 군사력, 경제력, 그리고 명분력을 기반으로 한 구미중심의 근대국제질서는 중국적 천하질서를 압도하게 된다. 따라서, 근대한국은 새로운 문명표준으로 등장한 근대국제질서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근대국가들간의 전쟁과 평화관계에 새롭게 익숙해져야 했다. 그 중에도 새롭게 체험하게 된 근대국제질서 속에서 독립된 정치단위체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정치단위체와의 전쟁관계를 넘어서서 평화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평화개념을 받아 들여야 한다.
    
정치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조직적 폭력수단을 동원하는 전쟁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존재해 왔으며, 이러한 전쟁을 피해 보려는 평화의 노력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한 유럽의 근대국제질서는 과거의 전쟁과는 규모와 강도 면에서 전혀 새로운 전쟁의 위험성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면서 본격적 국민전쟁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에 따라, 평화의 논의도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되었다. 따라서, 마이클 하워드는 {평화의 발명}에서 정치지도자들이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발명한 평화가 실현 가능한 것으로 또 진실로 추구해야 할 목표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여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19세기 유럽의 평화를 위한 노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결국 보수주의자들은 평화는 현존하는 질서를 보존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경제적, 사회적 진보를 통해 바로 그 질서를 변혁해야만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집단인 민족주의자들은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현시하기 위해 싸우고, 현시된 이후에 자신의 존재자체를 지키려고 하는 민족들의 권리에 정초한 질서를 신봉했다.」
    
이러한 19세기 유럽의 평화관들은 유럽 근대국제질서의 전세계적 확산과 함께 한구,중구,일본의 동양3국에서도 전통과 근대의 치열한 각축속에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뒤이어서, 구미의 기독교 평화론, 사회주의 평화론이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다. 서양의 근대적 peace개념이 동아시아에 도입되면서, 平和라고 번역하여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일본 명치시대 조직적 평화운동의 선구자인 기타무라 토코쿠(北村透谷)가 1889년에 일본평화회를 창설하고, 1892년 기관지 "平和"를 창간한 이후이다. 그는 창간사에서 「평화라는 문자는 대단히 새롭다. 기도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보다 더 새롭다. 더구나, 평화는 세상의 관심을 끌기 쉽지않을 도덕상의 문제이다. 그러나, 종교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인간의 양심이 세계를 떠나지 않는 한, 우리는 평화가 반드시 원대한 문제라는 것을 믿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기타무라 토코쿠가 일본 평화회를 설립하게 된 것은 퀘이커교도의 모임인 「영국 평화회(British Peace Society)」의 윌리암 존스(William Jones)가 1889년 도오쿄에서 행한 연설에서 영국평화회를 설명하면서 1871년 보불전쟁의 비참한 상황을 체험에 기반하여 전하면서 기독교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것에 자극받아 이루어졌다.
    
평화라는 용어가 한반도에서 국가간에 전쟁이 없는 상태의 의미로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1890년대 후반이다.1880년대의 한성순보(18823-1884)나 한성주보(1886-1888)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평화라는 용어가 1890년대 후반의 독립신문(1896-1899) 에서는 30회 사용되고있다. 그러나, 근대한국이 국가간의 관계를 유럽 근대질서의 전쟁과 평화의 시각에서 보려는 노력을 시작하는 것은 19세기 중반 만국공법의 도입과 함께였다.

   

1850년부터 중국에서 활동하던 개신교 미국선교사 윌리암 마틴(William A.P. Martin, 丁 良)은 미국의 국제법학자 헨리(Henry Wheaton)의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를 「萬國公法」이라는 이름으로 한역하여 총리아문의 지원 하에 1864년 출판했다.
    
당시 중국은 제1차 아편전쟁(1840) 이후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을 겪으면서 天津條約(1858)과 北京條約(1860)을 체결해야 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 속에서, 중국정부는 전통적으로 사대질서를 관리해 온 예部와 별도로 구미의 근대외교를 담당하는 統理衛門을 설치해서 二重外交를 시작해야 했다. 
    
한편, 구미열강들은 淸을 군사적으로 다루는 것을 넘어서서 만국공법의 틀속에서 외교적으로 다룰 수 있기 위해 중국에 국제법을 소개하기 원했고, 淸도 구미열강들의 사고와 행동양식이 단순히 폭력적이 아니라,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만국공법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당시 淸의 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恭親王은 「萬國公法」간행의 재가를 청하는 上奏文에서 중국과 서양제국의 외교교섭에서 상대방이 자주 중국의 법률을 원용하여 중국을 論破하려는 것을 그대로 뒤집어서, 서양제국의 만국공법을 원용하여 상대방을 논파하기 위해 만국공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淸이 구주제국의 행동양식이 단순히 금수와 같이 무력행사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만국공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법규범에 따르고 있는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淸은 이러한 규범을 바로 문명의 표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중국의 오랜 역사중에 春秋戰國시대에 유사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는 附會論을 전개하였다.
    
萬國公法이 정확하게 언제 한국에 전해졌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밝히지지 않고 있으나, 출판된 1864년 이후 조일수호조규가 맺어진 1876년 사이데 중국을 왕래하던 사절들에 의해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기 조선은 병인양요(1866) 제네럴 셔어먼호 사건(1866),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사건(1868), 신미양요(1871) 등을 거치면서 유럽의 근대국제질서와의 만남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나, 당시 우리사회의 주도적인 정치, 사회세력들은 서양세력에 대해 위정척사의 입장을 견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위정척사론을 대표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인 李恒老는 그의 「洋禍」에서 「中國의 道가 亡하면 夷狄과 禽獸가 몰려온다」고 지적하고, 이를 다시 주석에서「北虜(청)는 夷狄이니 오히려 말할 수 있지만, 西洋은 禽獸이니 가히 말할 것이 못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李恒老의 이와 같은 「華夷之別」에서 「人獸之判」으로 전개된 斥邪思想은 그의 제자인 金平默의 「禦洋論」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는 중국과 조선은 人類이나 서양은 禽獸라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서 중국과 조선은 人道를 가지고 있으나, 서양은 禽獸之道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人道의 내용으로서는 仁, 義, 禮, 智의 四瑞之德과 五品之論 및 禮樂刑政之敎를 들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당시 한청간의 중요한 비공식 통로였던 淸의 李鴻章과 조선의 領府事 李裕元과의 서신교환에서, 李鴻章이 조선이 일본이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以敵制敵」의 방안으로 서양의 여러나라와 조약을 체결하고 통상을 할 것을 권유하는 것에 대해서, 이유원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서양의 공법에는 이미 이유없이 남의 나라를 빼앗거나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러시아와 같은 강국으로서도 귀국에서 군대를 철수하였으나 혹시 우리나라에서 죄없이 남의 침략을 당하는 경우에도 여러나라에서 공동으로 규탄하여 나서게 되겠습니까. 한가지 어리둥절하여 의심이 가면서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유구왕을 폐하고 그 강토를 삼킨 것은 바로 못된 송나라 강왕의 행동이었습니다. 구라파의 다른 나라들 중에서는 응당 제환공처럼 군사를 일으켜 형나라를 옮겨놓고 위나라를 보호하거나 혹은 일본을 의리로 타이르기를 정장공이 허나라의 임금을 그대로 두게 한 것처럼 하는 나라가 있음직 한데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아도 들리는 말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터어키를 멸망의 위기에서 건져 준 것으로 보아서는 公法이 믿을 만한데 멸망한 유구국을 일으켜 세우는 데는 공법이 그 무슨 실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입니까. 또한 일본 사람들이 횡포하고 교활하여 여러나라들을 우습게 보면서 방자하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公法을 적용할 수 없는 것입니까.」

   

당시 국정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이유원의 만국공법 회의론에도 불구하고, 고종을 비롯한 개화세력의 만국공법에 대한 관심은 빠르게 높아갔다. 1880년 9월 金弘集은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오면서 주일공사 참찬관인 黃遵憲이 淸의 입장에서 19세기 조선의 생존전략을 요약한 「朝鮮策略」과 淸의 대표적 양무론자인 鄭觀應이 쓴 「易言」을 가지고 왔다. 이 글들은 근대한국의 생존전략으로서 自强과 均勢를 강조하고, 이를 위해서는 만국공법의 회의론을 넘어서서 만국공법을 활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국내 정치 사회세력들의 적지 않은 논쟁 속에서, 고종은 조심스럽게 개화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1880년 12월에는 관제를 개혁하고 대외관계기관으로 총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고, 1881년 2월에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고, 1881년 11월에 영선사를 청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1882년 5월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은 실질적으로 만국공법체제를 수용하게 되었다.

   

임오군란을 겪은 직후 고종은 1882년 9월 발표한 개화정책에 관한 교서에서 만국공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는 바다의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일찍이 외국과 교섭을 해오지 않았다. 따라서 견문이 넓지 못하고 삼가 스스로의 지조나 지키면서 500년 동안을 내려왔다. 근년 이래로 천하의 대세는 옛날과 판이하게 되었다. 구라파와 아메리카의 여러나라들 즉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 같은 나라들에서는 정밀한 기계를 만들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배나 수레가 온 세상을 두루 다 돌아다니고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병력으로 서로 대치하고 공법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기를 마치 춘추열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그러므로 홀로 존귀하다는 중화도 오히려 평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맺고 척양에 엄격하던 일본도 결국 수호를 맺고 통상을 하고 있으니 어찌 까닭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겠는가…조약을 맺고 통상하는 것은 세계의 공법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만일 그들이 우리 사람들을 업신여기거나 모욕할 때에는 응당 조약에 근거하여 처벌할 것이며 절대로 우리 백성들이 굽히게 하고 외국인을 두둔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그리고 이왕 서양의 각국과 좋은 관계를 가진 이상 京外에 세워놓은 척화비는 시기가 달라진 만큼 모두 일제히 뽑아버릴 것이다.」

   

고종의 이와 같은 입장표명이 이루어지자 만국공법에 대해 부정적이 아닌 긍정적인 입장의 논의들이 상소 등을 통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의 수준은 청의 만국공법 원용론과 부회론과 마찬가지로 구미 국제질서의 중요한 원칙으로서의 만국공법을 우리의 원칙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구미국가들의 잘못된 행동을 그들의 논리로서 論破하려는 원용론이었으며, 만국공법의 논리를 이미 우리의 전통속에서 찾아 볼 수 있어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부회론이었다. 19세기 조선의 동도서기론을 대표하는 인물인 김윤식은 이러한 입장을 다음의 글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원래 他交도 없으며 오직 淸國을 上國으로 모시고 동쪽의 일본과 통교하였을 뿐이다. 수십년 전부터 세상의 정형이 매일같이 변하며 歐洲는 雄長이 되고 동양의 제국이 모두 그 公法을 따르게 되었다. 이것을 버리면 고립하고 도움이 적어지며 혼자만으로는 나라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청국과 일본도 泰西 각국과 함께 이것을 수호하고 조약을 체결한 나라들이 벌써 20여 개국에 달한다.」

   

김윤식은 만국공법을 따라야 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조선의 생존을 위한 속방론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朝鮮이 中國의 屬方이라는 것을) 각국에 聲明하고 條約에 大書해 놓으면 후일 (中國은)  우리나라 有事時 힘써 도와주지 않으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며, 각국은 中國이 우리나라를 擔任하는 것을 보고 우리를 가볍게 보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그 밑에 自主權의 보유를 기재해 두면 각국과 外交하는 데 無害하여 平等權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自主權상실의 걱정도 없고(不觸), 事大의 義에도 背反되지 않으니(不背), 가히 兩得이라고 하겠습니다.]

   

김윤식의 兩得體制는 淸과의 자주적 속방관계를 유지하면서 태서 각국과 만국공법에 따라 조약을 체결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는 1885년 거문도 사건당시 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으로서 한성주재 청국상무총판, 미국대리공사, 일본대리공사, 독일총영사에 다음과 같은 조회를 보냈다.

 

「어제 北京에 있는 영국 공사관으로부터 조회가 왔는데 거기에는 이미 영국해군장관이 거문도에 임시로 가 있으면서 지킬 것에 대비하여 비준하였다는 등의 말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뜻밖의 사실로서 실로 公法에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니 본 대신은 개탄하여 마지 않는 바입니다.」

   

김윤식의 이 조회는 구미 제국들이 상대방 국가들의 법률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규제하는 것을 원용하여 구미국가 자신들의 법인 만국공법으로 상대방 국가들의 행동을 규제해 보려는 중요한 시도였다.

   

유길준은 김윤식의 원용론과 부회론을 넘어서서 만국공법의 기본원리를 일단 수용한다. 그는 초기 작품인 「世界大勢論(1883)」에서 세계를 개화의 차이에 따라 야만, 미개, 반개, 문명으로 나눈 다음 동아시아를 반개에 포함시키고, 구주제국과 미국을 일단 문명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는 「競爭論(1883)]에서 이러한 아시아와 유럽의 차이를" 獨其交通의 廣狹多小와 競爭의 大小高卑에 이를 따람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一國의 盛衰强弱이 競爭의 大小高卑에 在하니 萬一國이 競爭  바 업슨則 富强며 文明 境域에 進就지 못  따람이 아니라 其國을 保全지 못 니… 古語에 云되 敵國外患이 업슨則 國乃滅亡이라 니 其今其意을 擴論則 平時라도 外國競爭이 업스면 國必滅亡 다 이 可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조선이 문명부강하기 위해서는 「경쟁정신」으로 상대방의 장점을 배우고 우리의 장점을 보존하고 키워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유길준은 구미의 근대국제질서가 국가중심 경쟁질서라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국가들간의 公法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활용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言事疏(1883)」에서 러시아가 위협적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들이 비록 公法을 지키지 않는다고는 하나 아직은 공법을 두려워하는 바가 있는 까닭입니다.」라고 하고 있다.

     

그는 「中立論(1885)」에서 「한 나라가 약소하여 自力으로 중립의 城책을 지킬 수 없으면, 이웃 나라들이 서로 협의하여 행하기도 함으로써 자국 보호의 방책으로 삼기도 하니, 이는 바로 부득이한 형세에서 비롯된 것으로, 公法이 허용하고 있는 바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의 어려운 국제정치 현실을 분석한 다음 「아마도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중립국이 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대저 한 나라가 自强하지 못하고 여러 나라와의 조약에 의지해 간신히 자국을 보존하고자 하는 계책도 매우 구차한 것이니 어찌 즐겨 할 바 이겠는가. 그러나, 국가는 자국의 형세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 억지로 큰 소리를 치면 끝내 이로운 일이 없는 것이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
    

유길준은 『西遊見聞』(1887-1889/1895) 제 3편 [邦國의 權利]에서 본격적으로 만국공법을 수용하여 [邦國의 交際도 亦公法으로 操制야 天地의 無偏한 正理로 一視  道를 行則 大國도 一國이오 小國도 一國이라 國上에 國이 更無고 國下에 國이 亦無야 一國의 國 되  權利  彼此의 同然 地位로 分毫의 差殊가 不生지라]라고 강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그는 현실의 국제정치에서는 국가의 대소와 강약 때문에 형세가 적대하기 어려울 경우에 강대국이 公道를 돌아보지 않고 그 힘을 자의로 행사하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약소국은 강대국의 속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소국과 강대국의 관계는 주권과 독립권이 그대로 유지되는 受護國과 贈貢國의 관계가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는 [權利  天然한 正理며 形勢  人爲 剛力이라 弱小國이 元來 强大國을 向야 恣橫  剛力이 無고 但其自有 權利를 保守하기에 不暇則 强大國이 自己의 裕足 形勢를 擅用야 弱小國의 適當 正理  侵奪 은 不義 暴擧며 無道 惡習이니 公法의 不許  者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따라서, 유길준은 淸과 같은 수공국과 조선과 같은 수호국이 새롭게 겪는 국제질서를 다음과 같이 兩截體制로 부르고 있다.

[受貢國이 然則 諸國을 向야 同等의 禮度를 행하고 贈貢國을 對야 獨尊한 體貌를 擅리니 此  贈貢國의 體制가 受貢國反 諸他國을 向하야 前後의 兩截이오 受貢國의 體制도 贈貢國反 諸他國을 對하야 亦前後의 兩截이라 受貢國及 贈貢國의 兩截體制를 一視흠은 何故오 形勢의 强弱은 不顧하고 權利의 有無를 只管 니 强國의 妄尊은 公法의 譏刺가 自在고 弱國의 受侮는 公法의 保護가 是存지라 然한 故로 如是不一 偏滯  公法의 不行으로 弱者의 自保  道니 强者의 恣行  騎習을 助成기 爲야  公法의 一條도 不設흠이라]

   

한반도의 생존과 평화를 위해서, 유길준은 구미 국제질서의 기본원리인 국가 중심의 부국강병경쟁을 수용해서 일차적으로는 자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자강의 현실적 제약 속에서, 균세와 만국공법의 도움으로 淸과 속방관계가 아닌 증공국과 수공국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국가들과 근대 국제관계를 시도하게 된다. 따라서, 유길준의 평화관은 현실주의 평화관을 인정하면서도, 자유주의 평화관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생존과 평화가 쉽사리 보장되지 않는 속에 근대 한국은 보다 현실주의적 평화개념을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선행지표로서 일본의 대표적 문명개화론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만국공법관의 변화를 잠깐 훑어보도록 하겠다.후쿠자와 유키치는 [西洋事情(1868)    )]이나 [唐人往來(1865] 등에서 日本은 부국강병의 실력을 구비하면서 만국공법을 신뢰하고 따를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는 다음 단계로서, 만국공법의 허구성을 현실주의 시각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지금 금수세계에서 최후에 호소해야 할 길은 필사적인 獸力이 있을 뿐이다. 말하기를 길이 두 가지 있는데, 죽이는 것과 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一身處世의 길은 이와 같다. 그렇다면 萬國交際의 길도 또한 이것과 다르지 않다. 和親條約이라고 하고 萬國公法이라고 하여 심히 아름다운 것 같지만 오직 外面의 儀式名目에 불과하며 교제의 실은 귄위를 다투고 이익을 탐하는 데 불과하다. 세계고금의 사실을 보라. 貧弱無智의 小國이 조약과 公法에 잘 의뢰하여 독립의 체면을 다한 예가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는 바이다. 오직 소국 뿐 아니라 대국 사이에서도 바로 대립하여 서로가 그 틈을 엿보며 탈 수 있는 틈이 있으면 그것을 간과하는 나라는 없다. 이것을 엿보고 이것을 말하며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은 병력강약의 한 점이 있을 뿐이며 별로 의뢰해야 할 방편이 없다. 百卷의 萬國公法은 數門의 大砲에 미치지 못한다. 몇 권의 和親條約은 한 상자의 彈藥에 미치지 못한다. 대포, 탄약은 있을 수 있는 도리를 주장하는 준비가 아니라 없는 도리를 만드는 기계이다.]

   

한반도의 근대 평화관이 위정척사파의 만국공법 거부론에서, 동도서기론의 만국공법  원용론, 온건 개화론의  만국공법 수용론을 거쳐서 만국공법의 한계를 지적하고 자강과 균세에 기반한 국가 중심의 경쟁을 통해 국가의 생존과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논의에 이르게 된다.

   

1884년 1월 30일의 한성순보는 [洋務首在得人論]에서 만국공법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며 공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오늘날 유럽의 형세는 마치 전국시대와 같고, 이른바 만국공법이란 거의 전국시대 從約과 같아서 유리하면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배신하며 겉으로는 비록 따르는 체 하지만 속으로는 실상 위배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갑신정변(1884)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기약없는 조선의 개화를 꿈꾸면서 어려운 생활을 보내고 있던 박영효는 1888년 상소문의 형식을 빌려서 조선의 개혁방안을 상세하게 제안하고 있다. 그는 이 상소문을 시작하면서 당시의 국제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지금 세계의 모든 나라는 옛날 戰國時代의 열국들과 같습니다. 한결같이 兵勢를 으뜸으로 삼아,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를 병합하고,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삼키고 있습니다. 또한 항상 軍備를 강구하는 한편, 아울러 文藝를 진흥하여, 서로 경쟁하고 채찍질하며 앞을 다투지 않음이 없습니다. 각국이 自國의 뜻을 공고히 하여 세계에 위력을 흔들어 보고자 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의 빈 틈을 이용하여 그 나라를 빼앗으려 하고 있습니다.....비록 만국공법, 균세, 公儀가 있기는 하나, 나라가 自立自存의 힘이 없으면 반드시 영토의 삭탈과 분할을 초래하여 나라를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公法公儀는 본래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유럽의 문명강대국도 역시 패망을 맛보았는데, 하물며 아시아의 미개약소국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유럽인들은 입으로는 法義를 일컫지만 마음은 짐승을 품고 있습니다.]

   

유길준이 自强의 목표가 단기적으로 쉽사리 달성되기 어렵기 때문에, 균세와 만국공법의 도움을 얻어서 양절체제를 시도해 보려는 것과 비교하여, 박영효는 만국공법이나 균세가 있더라도 국가가 自立自存의 힘이 없다면 나라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만국공법을 믿을 것이 못된다고 단정하고 있다.

   

청일전쟁과 함께 근대한국의 평화개념도입은 다시 한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우선, 청일전쟁에서 淸이 패배하고 일본이 승리하자, 중국은 1840년의 아편전쟁 이후 반세기만에 구미의 근대국제질서를 새로운 문명표준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淸의 종주권이 명실상부하게 소멸되고 일본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위험 속에서, 위정척사론자들의 인간과 금수의 이분법에 기반한 만국공법 거부론 대신에 동도서기론자들의 만국공법 원용론을 채택하게 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친일내각이 단발령을 내리고 개혁정책을 추진하자 유생들의 항일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이 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최익현은 상소문에서 "각국이 통화하는 데에는 이른바 공법이란 것이 있고 또 조약이라는 것이 있다는데, 이속에 과연 이웃나라의 역적을 도와 남의 나라 임금을 협박하고 국모를 시해하라는 문구가 있는가" 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1905년 을사5조약이후의 의병활동에서 계승된다.

   

청일전쟁의 결과로 한반도에서 청의 종주권이 실질적으로 소멸하게 됨에 따라, 국내의 유생들은 양무론을 넘어서서 변법론의 불가피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청의 양계초의 음빙실문집 등을 통해서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국제질서관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편, 갑신정변(1884)의 실패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섰던 개화세력들은 갑오개혁을 통한 역사현장에의 복귀를 시도하고, 고종은 광무개혁(1897-1907)을 통해 나라의 기울어짐을 막아보려는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내의 정치사회세력들은 다양한 갈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세동점이래 처음으로 개신유학론자들과 문명개화론자들은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전쟁과 평화관을 공유하기 시작하는 중요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애국계몽기(1905-1910)의 신문이나 잡지들을 통해서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근대한국의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전쟁과 평화관은 청일전쟁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일본의 "동양평화론"을 맞이하여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일본의 총리대신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는 1894년 10월20일 임시의회에서 개전에 이른 과정을 설명하고, 이 전쟁이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공격적 민족주의의 전쟁적 평화관은 러일전쟁이후 기독교평화론을 대표하는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를 포함한 광범위한 일본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결과가 "동양평화"대신에 삼국간섭에 직면하게 됨에 됨에 따라, 일본은 부국강병의 평화관에 전념하게 된다.1900년대에 들어서서, 러일전쟁을 앞두고, 이러한 "무장적 평화론"에 대한 비판이 사회주의 평화론을대표하는 코토쿠 슈스이(幸德秋水)와 기독교 평화론을 대표하는 우찌무라 간조 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20세기초 조선의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평화관은 사회진화론의 양면성, 즉 경쟁진보와 약육강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선, 조선이 20세기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역문명표준으로  등장한 일본을 받아들여서 진보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잘 요약하고 있는 최석하는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세계열강의 하나가 되었고, 천하대세와 세계치난을 논하려면. 일본을 제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일본문명을 연구하는 것은 세계 각 나라 사람들의 시대적 요구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일본의 "동양평화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반면에, 20세기 조선의 평화에 정말 중요한 것은 약육강식의 부정적 경쟁관계에서 어떻게 살아 남느냐라는 것이다. 채기두는 "평화적 전쟁"에서 19세기이래의 세계정세를 각나라의 문화가 발달하던 국민주의의 쟁투시대, 인구증가와 좁은 영토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주의를 주장하던 시기, 그리고 제국주의 시기의 3단계로 구분하고,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는 명칭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평화적 전쟁에 불과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회진화론의 부정적 모습인 제국주의에 대한 보다 본격적 비판라고 할수 있는 코토쿠 슈스이의 사회주의 평화론은 단재 신채호 등을 통해서, 우찌무라 간조의 기독교 평화론은 김교신, 함석헌을 통해서 국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자유주의 평화론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칸트의 구평화론이 1925년 개벽을 통해 뒤늦게 소개된다.

     

19세기 조선은 유럽의 근대국제질서를 받아 들이면서, 근대한국의 생존과 평화를 위해 구미의 자유주의, 민족주의등의 평화개념을 국내외 정치사회세력의 갈등속에서 도입하여,그 기반위에 자강과 균세의 한반도 평화질서를 구축해 보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국망의 비극을 맞이하엤다. 근대한국은 1945년 해방과 함께 다시 한번 펑화질서를 모색하였으나,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겪은 후, 21세기를 맞이한 오늘까지도 한반도 평화를 미해결의 숙제로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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