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act    
문명의 국제 정치학 : 근대 한국의 문명 개념 도입사
 

2002-11-15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동안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 속에서 삶을 엮어왔던 한반도는 19세기 중반 뒤늦게 구미 중심의 근대 국제질서를 문명의 새로운 표준으로서 받아 들여야 하는 역사적 충격을 맞이하였다.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구미 중심의 근대 국제질서를 받아들이느라고 힘든 노력을 기울여 왔던 한반도는 21세기를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새로운 문명의 표준과 만나야 할 역사적 가능성에 직면하고 있다.

 

19세기 문명 표준에 성공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21세기 문명 표준과 새롭게 만나는 오늘의 시점에서, 바람직한 한반도의 삶을 가꿔나가기 위해서는 19세기이래 한반도 현실을 문명의 국제 정치학이라는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반도를 위한 문명의 국제 정치학은 19세기 조선의 문명개념 도입사 연구부터 출발해야 한다.

 

19세기 조선의 문명 개념 도입은 단순히 문명이라는 용어의 새로운 사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명이라는 개념이 한반도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구미 중심의 근대 국제질서와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가 서로 만나는 속에 서양의 무력, 금력과 함께 문명 개념이 도입되었으며, 이러한 도입과정에서 국내의 정치 사회 세력간에 치열한 언어 전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문명 개념 도입사의 심층 구조를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Reinhart Koselleck의 개념사(Begriffsgeschichte)연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념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어원사, 지성사, 또는 사상사와 비교하여 사회사의 틀속에서 개념사를 분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개념 변화의 역사를 사회사와의 밀접한 관련속에서 분석하기는 하되, 개념사가 사회사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념사와 사회사를 결합함으로써 살아있는 역사의 모습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개념사의 연구는 유럽에서는 독일의 근대 정치 및 사회 개념사 사전과 같은 기념비적 업적을 비롯하여 눈에 띌만한 성과물을 생산했다. 그러나 유럽의 이러한 시도가 동아시아에서는 현재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비교적 자명하다. 동아시아는 자신들의 전통 정치 및 사회 현실과의 갈등 속에서 유럽의 근대 정치 및 사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에서, 유럽의 근대 정치 및 사회 개념들을 자신들의 전통 언어로서 번역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개념사 연구는 유럽의 근대 개념사 및 사회사와 동아시아의 전통 개념사 및 사회사의 복합화를 분석해야 하는 이중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개념사 연구는 절실하게 필요하다. 21세기 한·중·일의 자화상을 제대로 보고 미래의 바람직한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서는 19세기이래 전통 동아시아가 유럽의 근대 국제 질서를 어떻게 받아들여서 변모하여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밝히는 문명의 국제 정치학이 제대로 자리잡아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개념사 연구 수준은 초보적인 어원사 또는 개념전파 경로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연구는 한반도의 국제 정치 개념 도입사를 문명의 국제정치학이라는 거시적 틀속에서 조명하여 보려는 첫 출발이 될 것이다.


I. 조선의 문명개념 도입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근대국제질서는 포르트갈 주도의 16세기, 네덜란드 주도의 17세기, 영국 주도의 18세기를 거쳐, 다시 한번 영국 주도의 19세기를 맞이하였다.  산업혁명이라는 역사적 변화속에서 지난 세기에 이어 두 번째로 영국이 주도하게 된 19세기는 16세기이래 이제까지 이루어졌던 국제화를 넘어선 보다 본격적인 국제화의 세기였다.  이에 따라서, 중국은 1840년대에, 그리고 일본은 1850년대에 유럽의 근대국제질서와의 본격적 만남을 시작하게 되었다.

 

조선도 1860년대에 들어서서 병인양요(1866), 제네럴 셔어먼호 사건(1866), 오페르트 南延君墓 도굴사건(1868), 신미양요(1871) 등을 거치면서 유럽의 근대국제질서와의 만남이 불가피하게 되어 갔다. 이러한 속에서, 당시 우리 사회의 주도적인 정치, 사회세력들은 서양세력에 대해 위정척사의 입장을 견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위정척사론을 대표하는 사람들중의 하나인 李恒老는 그의 [洋禍]에서 [中國의 道가 亡하면 夷狄과 禽獸가 몰려온다]고 지적하고, 이를 다시 주석에서 [北虜(청)는 夷狄이니 오히려 말할 수 있지만, 西洋은 禽獸이니 可히 말할 것이 못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李恒老의 이와 같은 [華夷之別]에서 [人獸之判]으로 전개된 斥邪思想은 그의 제자인 金平默의 [禦洋論]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는 중국과 조선은 人類이나 서양은 禽獸라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서 중국과 조선은 人道를 가지고 있으나, 서양은 禽獸之道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人道의 내용으로서는 仁, 義, 禮, 智의 四瑞之德과 五品之論 및 禮樂刑政之敎를 들고 있다.

 

斥邪思想의 이러한 전통은 19세기 조선조의 사고와 행동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9세기 새로운 문명 표준의 화려한 등장에도 쉽사리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斥邪思想의 마지막을 장식한 柳麟錫은 宇宙問答(1913)에서 사람들이 모두 서양을 문명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다.

 

중국은 옛 聖王聖人이 이를 밝혀 上達道理하였고, 지금의 서양은 이를 밝혀 下達形氣하고 있으니, 설혹 仁讓이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일만으로 경쟁할 수 있겠는가. 上達道理를 문명이라 하겠는가, 아니면 下達形氣를 문명이라 하겠는가.
 

옛날 중국이 五常五倫을 밝혔다는 말은 들었으나, 오늘날 서양이 五常五倫을 밝혔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五常五倫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므로 일에서 그것을 밝힐 수 없다. 五常五倫을 밝히는 것이 문명이겠는가, 五常五倫을 밝히지 않는 것이 문명이겠는가.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三代가 專制를 했다고 黑陷이라 말하고 서양이 立憲共和를 한다고 해서 문명이라 하는데, 그 법의 옳고 그름은 그만두고라도, 三代의 人物政化가 과연 서양보다 못해서 黑陷이라 하며, 서양의 人物政化가 과연 三代보다 훌륭해서 문명이라고 한다는 말인가.
 

그들이 말하는 문명은 백가지 기술과 천가지 기교가 극에 이르도록 하는 것으로, 그 궁극적 의도는 맛있는 음식, 사치스러운 옷, 웅장한 집, 강한 병사 등의 일을 모도 하는 것에 불과하다.

 

柳麟錫은 이러한 문명관 위에 서서 守舊人으로서 開化人을 다음과 같이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들이 비록 舊法이 나라를 망친다고 하나, 나라가 망하는 것은 개화를 행한 후에 일어났다. 개화를 한다면서 그 하는 바는 국모를 시해하고 君父를 폐하며 인륜을 무너뜨리고 법률과 기강을 문란케 하고 나라를 팔아 결국은 나라가 망함에 이르렀다. 구법을 써서 망하더라도 어찌 개화를 해서 망하는 것보다 심하겠으며, 비록 나라가 망하더라도 바르게 하다가 망하고 깨끗하게 하다가 망하는 것이다. 개화를 해서 극악하고 더럽게 망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비록 수구인을 탁하지만 국모를 시해하고 君父를 폐하고, 나라를 팔아 망하게 한 것은 모두 開化人들이 한 짓이요, 망국을 애통하여 순절하며 의거한 자는 모두 守舊人들이다. 나라의 上下大小人들이 모두 守舊人의 마음을 갖도록 한다면 나라는 망하지 않을 것이며 혹 망하더라도 그렇게 빠르게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개화를 하여 나라가 망하는데도 오히려 개화를 주장하며 개화를 새로운 법이라 하니, 신법도 또한 미혹함이 심하구나.

 

그러나 [人獸觀]에 기반한 위정척사론으로서는 점증하는 외압의 위기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게 되어, 1876년의 한일수호조규의 체결이후, 1880년대에 들어서서는 임오군란(1882)을 치른 후 개화의 길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속에서 東洋의 道와 西洋의 器를 결합하여 보려는 東道西器論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申箕善은 農政新編序에서 道와 器는 서로 나누어져 있으며 동시에 서로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道의 내용으로는 三綱, 五常 과 孝弟忠信을 들고 있으며 器로서는 禮樂, 刑政, 服食, 器用을 들고 있다.

 

그러나, 東道西器論의 문명관은 어디까지나 東道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西器의 수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東道西器論을 대표하는 관료였던 金允植은 1891년에 쓴 자신의 글에서 "나는 일찍이 開化之說을 심히 이상하게 여겼었다. 무릇 개화란 변방의 미개족이 거친 풍속을 고치고 歐州의 풍속을 듣고 점차 고쳐 나가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 東土는 문명의 땅이 어찌 개화하겠는가?...... 이 開發變化라고 하는 말은 文飾의 말이다.  소위 開化란 時務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그는 조선의 시무로서 “청렴을 숭상하고 가난을 제거하여 백성을 구휼하는데 힘쓰며 조약을 잘 지켜 우방과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衛正斥邪, 그리고 東道西器의 시각에서 구미국가들과 중국, 일본과 같은 주변국가들을 다루어 보려는 노력들이 쉽사리 성공하기 어려운 현실적 한계 속에서, 文明開化의 시각에서 歐美세력을 조심스럽게 19세기 국제화의 새로운 문명기준으로서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자리잡게 된다. 일본과 비교하여 전통과 근대의 갈등을 보다 힘들게 겪고 있던 19세기 조선에서 文明 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대표적인 개화지식인인 유길준이 일본 유학(1881.5 - 1883.1)의 초기에 福澤諭吉이 경영하는 時事新報에 쓴 {新聞의 氣力을 論함}에서 "大槪 나라를 開化로 가게하고 文明으로 引導케 하는 活發의 氣象과 奮揚의 마음과 維持의 힘을 으뜸으로 한다.…따라서 이 셋을 가진 然後에 開化하려고 하면 開化할 수 있고 文明하려고 하면 文明할 수 있다."라는 표현에서 문명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있다.

 

유길준은 1883년의 {한성순보 창간사}에서 '文明事物', '開化文明의 進步', '文明諸國', '一國文明', '文明 新域', '文明 境域', '文明이 未開한 國' 등과 같은 용어에서 보다시피 문명 개념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이와 함께 '其國의 文化가 未開하며', '文化進步', '本國文化가 아직 廣開치 못야', '智愚와 文化' 등에서 문화 개념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으며, 그 중에 특히 흥미있는 것은 유길준이 쓴 "其國의 文明을 增進게  데 不出 니…"의 표현 중에서 박영효로 알려져 있는 교정자가 文明을 文化로 고쳐놓은 것이다.

 

유길준은 1883년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세계대세론}, {경쟁론} 등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문명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유길준은 {세계대세론}에서 인류를 開化殊異에 따라서 야만, 미개, 반개, 문명으로 나누고 문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第四  文明이니 半開地位를 脫하고 一進則 文明이니 文明이라   者  農工商의 諸業이 盛大고 文學技術에 篤實 이니 歐洲諸國과밋 亞墨利加合衆國 갓튼者을 云 이라.

 

유길준은 이어서 오늘의 시점에서는 구주제국과 미국을 문명개화국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글이 결단코 개화의 극이 아니며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므로 노력할 것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右四條等級의 殊異을 分知야 自己國朝의  辱慢侮을 志却지 말며 習慣成俗을 輕忽히지 말고 他國이 文明에 進就한 以然者을 推察야 我國開化進步을 計較 者  眞可謂憂國賢士며 愛君忠臣이니 我東方同胞兄弟 幾千萬諸公에게 願하노라.

 

유길준의 이러한 문명관은 그의 대표적 저서인 {西遊見聞(1887-1889 집필, 1895 東京 交詢社에서 발행)}에서 다시 한 번 요약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이 책의 제 14편에 포함되어 있는 개화의 등급에서 “大  開化라   者  人間의 千事万物이 至善極美 境域에 抵흠을 謂흠이니 然 故로 開化   境域은 限定기 不能 者라 人民才力의 分數로 其等級의 高低가 有하나 然나 人民의 習尙과 邦國의 規模를 隨야 其差異흠도 亦生 니 此  開化  軌程의 不一 緣由어니와 大頭腦  人의 爲不爲에 在    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다음으로, 福澤諭吉이 {文明論之槪略}에서 智德의 개화, 政法의 개화, 의식주와 기계의 개화로 나누고 있는 것처럼, 유길준은 이러한 開化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行實의 개화, 學術의 개화, 政治의 개화, 法律의 개화, 器械의 개화, 物品의 개화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五倫의 行實을 純篤히 야 人이 道理를 知 則 此  行實의 開化며 人이 學術을 窮究야 萬物의 理致를 格 則 此  學術의 開化며 國家의 政治를 正大히 야 百姓이 泰平 樂이 有 者  정치의 開化며 法律을 公平히 야 百姓이 寃抑 事가 無 者  法律의 開化며 器械의 制度를 便利히 야 人의 用을 利게  者는 器械의 開化며 物品의 制造를 精緊히 야 人의 生을 厚히 고 荒  事가 無한 者는 物品의 開化니 此屢條의 開化를 合한 然後에 開化의 具備 者라 始謂 디라.

 

유길준은 천하고금의 어느 나라라도 이러한 개화의 극진한 境域에 도달한 나라는 없으나, 그 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눈다면 開化, 半開化, 未開化로 구별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스스로 노력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半開化한 자와 未開化한 자도 開化한 자의 境域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II. 전통과 근대의 복합화

 

19세기 유럽의 근대 국제 질서가 새로운 문명 표준으로서 동아시아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질서를 문명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에 직면하여 19세기 주선은 위정척사, 동도서기, 문명 개화라는 다른 유형의 대응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문명 개념의 도입사는 곧 치열한 언어의 정치, 언어의 전쟁 모습을 띌 수밖에 없었다.

 

국내 정치 사회 세력에 오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위정 척사 세력은 전통 언술체계로서 서세동점에 따라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을 담아보려는 힘겨운 싸움을 시도하였으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한편, 문명 개화세력은 국내의 막강한 전통 정치 사회 세력의 저항 속에서 새로운 언술 체계의 시도는 강한 반발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문명 개화세력은 갑신정변(1884)의 실패로 인해 정치적으로 치명적 타격을 입고 역사의 전면에서 일단 물러서야 했다. 이러한 역사의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작게는 자신들의 생존을, 크게는 조선의 생존을 내다보면서 문명 개화세력은 문명 개념의 도입을 전통과 근대의 복합화라는 시각에서 조심스럽게 추진했다. 이제, 19세기 조선에서 문명 개념 도입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유길준의 힘든 노력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유길준은 {世界大勢論}에서 이미 전통과 근대의 균형을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으며, {西遊見聞}에서는 개화를 實狀開化와 虛名開化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且夫 開化  實狀과 虛名의 分別이 有하니 實狀開化라   者  事物의 理致와 根本을 窮究며 考諒야 其國의 處地와 時勢에 合當케   者며, 虛名開化라   者  事物上에 知識이 不足호  他人의 景況을 見고 歆羨야 然든지 恐懼야 然든지 前後를 推量  知識이 無고 施行기로 主張야 財를 費기 不少호  實用은 其分數를 抵하기 不及흠이니 外國을 始通  者가 一次는 虛名의 開化를 經歷나 歲月의 久遠흠으로 無限 練歷이 有 後에 至 則 實狀開化에 始赴흠이다.

 

따라서 그는 實名開化를 위해서는 "他人의 長技를 取   아니오 自己의 善美 者를 保守기에도 在니 大  他人의 長技를 取   아니오 自己의 善美 者를 保守기에도 在니 大  他人의 長技를 取  意向도 自己의 善美 者를 補기 爲흠인 故로 他人의 才操를 取야도 實狀잇게 用  時  則 自己의 才操라 時勢를 量며 處地를 審하야 輕重과 利害를 判斷 然後에 前後를 分辨야 次序로 흠이 可거 "하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開化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는 開化의 奴隸로부터 벗어나서 開化의 賓客을 거쳐 開化의 主人이 될 것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開化  事를 主張야 務行  者는 開化의 主人이오 開化  者를 歆羨야 學기를 喜고 取기를 樂  者  開化의 賓客이며 開化  者를 恐懼하고 疾惡호  不得己야 從  者  開化의 奴隸니… 外國의 新開化를 初見  者가 其始에  嫌懼며 疾惡야 不取기 不可 者가 有 則 已기 不得야 取用  形貌가 開化의 奴隸를 不免다가 及其 聞見이 廣博며 知覺이 高明 時  當면 始乃 開化賓客이 되 니 此를 因야 勉行기 不已면 主人의 堂戶에 入居기도 成就 디라.

더 나아가서, 유길준은 개화의 죄인, 개화의 원수, 그리고 개화의 병신이라는 강한 표현을 사용하여 당시 조선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격렬히 비판하고 있다.

 

外國이면 盡善다야 自己의 國에  始何 事物이든지 不美다며 已甚기에 至야  外國의 景 을 稱道야 自己의 國을 慢侮  弊俗도 有니 此를 開化黨이라 謂나 此豈 開化黨이리오 其實은 開化의 罪人이며 不及 者  頑固 性稟으로 事物의 分界가 無고 外國人이면 夷狄이라고 外國物이면 無用件이라고 外國文字  天主學이라야 敢히 就近지 못며 自己의 身이 天下의 第一인듯 自處나 甚기에 至야  避居  者도 有니 此를 守舊黨이라 謂나 此豈 守舊黨이리오 其實은 開化의  敵이니… 若其口中에 外國卷烟을 含고 胸前에 外國時標를 佩며 其身이   이나 交椅에 踞坐야 外國의 風俗을 閒話야 其言語를 略解  者가 豈曰 開化人이리오 此  開化의 罪人도 아니오 開化의  敵도 아니라 개화의 虛風에 吹야 心中에 主見업시 一箇 開化의 病身이라.

 

전통없는 근대를 추구하는 개화의 죄인과, 근대없는 전통을 추구하는 개화의 원수, 전통의 긍정적 측면을 버리고 근대의 부정적 측면만 받아들인 개화의 병신만 존재하고 있는 19세기 후반 조선의 현실 속에서, 유길준이 당면하고 있었던 최대의 과제는 단순한 서양문명의 소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통과 근대의 갈등이 아닌 조화를, 더 나아가서 복합화를 당시의 어려운 국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길준은 [開化의 等級]에 관한 논의를 끝내면서 다시 한 번 개화와 전통의 복합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우선 세상이 엄청나게 변화하고 있는 속에서 제대로 응변하지 못하면 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논의를 마치고 있다.

 

抑此新奇고 深妙 理致  舊世界에 不存고 今日에 始有 者아나오 天地間의 其自然 根本은 古今의 差異가 無  古人은 窮格기 不盡고 今人은 窮究야 攄到 者니 此를 由야 觀면 今人의 才識이 古人에 比야 越加 듯 나 然나 實狀은 古人의 草創 者  潤色    이라 火輪船이 雖曰 神妙나 古人의 作舟 制度  違기  不能고 火輪車가 雖曰 奇異나 古人의 造車 規模  不由면 不成 디오 此外에도 如何 事物이든지 皆然야 古人의 成法을 離脫고 今人의 新規   出기  不能니 我邦에도 高麗磁器  天下의 有名 者며 李忠武의 龜船은 鐵甲兵船이라 天下의 最先 出 者며 校書 의 鐵鑄字도 天下의 最先創行 者라 我邦人이 萬若 窮究고 又窮究야 便利 道理  經營얏드면 千萬事物이 今日에 至야 天下萬國의 名譽가 我邦에 歸얏슬디어  後輩가 前人의 舊規  潤色디아니흠이로다.

 

유길준의 이러한 꿈의 내용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그리고 있는 문명개화의 세계를 보다 조심스럽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개화가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적어도 여섯 부문의 개화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우선, 福澤諭吉의 智德의 개화에 해당하는, 行實의 개화와 學術의 개화를 함께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유길준은 {西遊見聞}에서 개화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五倫의 行實을 純篤히 해서 사람의 道理를 아는 行實의 개화를 강조하고, 이 行實의 개화만 천하만국을 통하여 동일한 것으로 政治, 法律, 器械, 物品의 개화와는 달리 천년만년의 장구한 세월이 흐른다 하더라도 그 규모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竊想건  行實의 開化  天下萬國을 通야 其同一 規模가 千萬年의 長久흠을 閱歷야도 不變  者어니와 政治以下의 諸開化  時代를 隨야 變改기도며 地方을 從야 殊異기도 리니 然 故로 古에 合든 者가 今에  不合  者가 有며 彼에 善 者가 此에  不善 者도 有 則 古今의 形勢를 斟酌며 彼此의 事情을 比較야 其長을 取고 其短을 捨흠이 開化  者의 大道라.

 

그는 말년 작품인{勞動夜學讀本}(1908)의 제1과 [人]에서 사람의 사람 노릇하는 6대 근본으로서 사람의 사람되는 권리, 의미, 자격, 직업, 복록과 함께 사람의 사람되는 도리를 첫 번째로 들고, 제2과 [人의 道理]에서 사람의 도리는 곧 사람의 행실이라고 말하면서 가족의 倫紀로서 부모의 자애, 자녀의 효도, 부부의 和順, 형제의 우애를 들고, 국가의 倫紀로서 임금이 임금의 일을 행하고, 신하와 백성이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을 들고, 사회의 倫紀로서 사람간의 믿음, 귀천의 등분, 상하의 차례 있음을 들고 있다. 그리고 제33과 [道德]에서 "道德은 사람의 착

일이라 사람이 此로 以相로 依나니 나라가 비록 갈오대 富强나 도덕으로써 지 아니면 그 부강이 참부강이 아니오 社會가 비록 갈오대 文明나 도덕으로써 지 아니면 그 문명이 참문명 아니라"고 설명하고 이어서 “도덕은 세상일의 벼리이니 사람이 此를  나고  착 일이 업신 즉 其範圍가 甚히 廣大야 한두가지로 指定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말삼 진대 갈오대 私로운 道德은 한사람의 셔로 與러 는 일이오 갈오대 公된 道德은 社會와 國家에 對는 일이니 가령 자식이 어버이에게 효도 과 형뎨의 셔로 우애 이며 夫婦의 셔로 和 은 私事이어니와 慈善事業을 도으며 公衆利益을 重히고   부셰 밧치기를 잘며 병뎡되기를 실혀 아니는 류  公 된 일이니라.”

 

유길준은 교육과 학술의 개화와 관련하여 {西遊見聞} 제3편에 포함되어 있는 [人民의 敎育]에서 "邦國의 貧富强弱治亂存亡이 其人民敎育의 高下有無에 在 者라"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육의 기본취지로서 正德, 利用, 厚生을 들고, 이에 따라서 교육의 명목을 셋으로 나누어서 "一曰 道德의 敎育이며 二曰 才藝의 敎育이며 三曰 工業의 敎育이라 道德은 人의 心을 敎導하야 倫 의 綱紀를 建며 言行의 節操  飭니 人世의 交際를 管制  者인 則 其 敎育의 無흠이 不可하고 才藝  人의 智를 養成야 事物의 理由를 達며 本末의 功用을  니 人世의 知識을 掌轄  者인 則 其敎育의 無흠이 不可고 工業에 至야  百千般心勞力役의 製造運用을 關係니 人世의 生道  建成  者인 則 其敎育의 缺乏흠이 亦不可야 此를 謂  敎育의 三大綱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유길준은 학업을 虛名과 實狀으로 구별하고 "如何 學業을 虛名이라 謂 가 理致를 不究하고 文字를 是尙야 靑春으로 自首에 至도록 詩文의 工夫로 自娛  利用  策略과 厚生  方道  無흠이오 又 實狀잇  學業은 如何 者를 指흠인가 事物의 理를 窮格야 其性을 盡고 晝夜로 勤孜야 百千萬條의 實用애 其意를 專흠이니 然 故로 學業의 名稱은 彼此가 一般이나 其虛實의 懸殊  雲泥의 判異흠이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는 서양 학술의 내력을 소개하면서 "大抵 泰西學術의 大主意  萬物의 原理를 硏究며 其功用을 發明야 人生의 便利 道理를 助거에 在니 諸學者의 日夜로 苦心  經綸이 實狀은 天下人을 爲야 其用을 利게 고 因야 其生을 厚게 며 又因야 其德을 正게 흠이니 學術의 功效와 敎化가 엇디 不大리오"라고 말하고 있다.

 

福澤諭吉은 {文明論之槪略}에서 국민의 智德을 論하면서 德義를 貞實, 潔白, 謙遜, 律儀와 같이 개인의 마음에 속하는 私德과 廉恥, 公平, 正中, 勇强과 같이 외적 대상과 접속하고 남들과 교제할 때 나타나는 公德으로 나누고, 지혜를 사물의 이치를 구명하고 이에 적응하는 私智와 인간사의 경중대소를 분별하여 輕小한 것을 뒤로 돌리고 중대한 것을 앞세워 그 때와 장소를 살피는 公智로 나누고, 그 중에서 公智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에 비해서, 유길준은 유교의 전통적 덕목인 오륜을 행실의 개화의 기본으로 삼고, 이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다.

 

福澤諭吉이 智德의 개화에 이어 政法의 개화를 논의하고 있는 것처럼, 유길준은 行實과 學術의 개화에 이어 政治와 法律의 개화를 강조하고 있다. 政治의 개화를 위해서는 첫째,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청의 급격한 영향력의 강화 속에서 당시 조선이 놓이게 된 兩截體制라는 이중구조의 어려움을 풀어 나가기 위해서, 유길준은 우선 구미 근대국제질서의 명분체계로 등장한 만국공법의 논리를 빌어서 국가는 마땅히 現存과 自衛하는 권리, 독립하는 권리, 産業(土地)의 권리, 立法하는 권리, 交涉과 派使와 通商의 권리, 講和와 結約하는 권리, 中立하는 권리를 보장받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유길준은 국내 정치에서 사람들의 강약과 빈부의 차이가 있더라도 사람들이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것은 國法의 公道로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이와 마찬가지로 {邦國의 交際도 亦公法으로 操制야 天地의 無偏 正理로 一視  道를 行 則大國도 一國이오 小國도 一國이라 國上에 國이 更無고 國下에 國이 亦無야 一國의 國되  權利  彼此의 同然 地位로 分毫의 差殊가 不生지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유길준은 만국공법에 기반한 이러한 명분체계를 강조한 다음에, 나라의 대소와 강약 때문에 그 형세를 대적하지 못해서 강대국이 公道를 고려하지 않고 그 힘을 자의로 행사하는 현실체계에서 형성되는 受護國과 贈貢國의 관계에 대해 상세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權利  天然 正理며 形勢  人爲 剛力이라 弱小國이 元來 强大國을 向야 恣橫  剛力이 無고 但 其自有 權利를 保守기에 不暇 則 强大國이 自己의 裕足 形勢  擅用야 弱小國의 適當 正理를 侵奪흠은 不義 暴擧며 無道 惡習이니 公法의 不許  者라.”고 강조하고, 贈貢國과 屬國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大  屬邦은 其服事  國의 政令制度를 一遵야 內外諸般事務에 自主  權利가 全無고 贈貢國은 强大國의 侵伐을 免기 爲야 其不敵 形勢  自思고 雖本心에 不合야도 約章을 遵守야 貢物을 贈遺고 其享有 權利의 分度로 獨立主權을 獲存흠이라.”

 

따라서, 유길준은 당시의 한·청관계에서 조선을 贈貢國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屬國으로 볼 것인가의 논쟁 속에서, 한·청관계를 속국관계 대신에 증공국과 수공국의 관계로서 설정하고 "夫國은 其處地와 形勢를 自知흠이 貴니 弱國이 不幸한 事情으로 强國에 贈貢  關係가 一有 則 兩國間의 交涉  禮度와 法例를 遂定야 强國이 受貢  權利  保有고 公法의 承認으로 其基礎를 確立야 他邦의 揷理와 干涉을 不容 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는 당시 조선이 당면하게 된 새로운 바깥질서를 전통과 근대의 이중적 국제질서로 파악하고 이를 兩截體制로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受貢國이 然則 諸國을 向야 同等의 禮度를 행하고 贈貢國을 對야 獨尊한  貌를 擅리니 此  贈貢國의  制가 受貢國及 諸他國을 向하야 前後의 兩截이오 受貢國의  制도 贈貢國及 諸他國을 對하야 亦前後의 兩截이라 受貢國及 贈貢國의 兩截 制를 一視흠은 何故오 形勢의 强弱은 不顧하고 權利의 有無를 只管 니 强國의 妄尊은 公法의 譏刺가 自在고 弱國의 受侮  公法의 保護가 是存지라 然 故로 如是不一 偏滯  公法의 不行으로 弱者의 自保  道니 强者의 恣行  驕習을 助成기 爲야  公法의 一條도 不設흠이라.

 

유길준은 이러한 兩截體制의 현실 속에서 淸과의 관계를 屬國이 아닌, 贈貢國과 受貢國의 관계로 만들어 나가면서 동시에 淸이외의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만국공법에 기반한 근대국제관계로 만들어 나가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政治의 개화를 위해 '邦國의 權利' 보장에 이어 自由와 通義에 기반한 '人民의 權利'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自由  其心의 所好   로 何事든지 從야 窮屈拘碍  思慮의 無흠을 謂흠이로  決斷코 任意放蕩  趣旨아니며 非法縱恣  擧措아니오 又 他人의 事   不顧고 自己의 利慾을 自逞  意思아니라 乃國家의 法律을 敬奉고 正直 道理로 自持야 自己의 當行  人世職分으로 他人을 妨害지도 勿며 他人의 妨害도 勿受고 其所欲爲  自由  權利”라는 것이다.

 

유길준은 {勞動夜學讀本} 34과 [사람의 自由]에서 자유의 의미를 보다 쉽게 풀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自由  字意대로 스사로 말매암이니 스사로 말매암이라 믄 일은 말삼대로 解진대 하고 십흔 일을 고 하고 십지 아닌 일은 아니다 이오녀 그러하나 사람이 獨로 이 셰샹에 사지아니 즉 엇디 이러 리치가 잇시리오… 내가 自由가 잇신즉 남도 自由가 잇시니 사람이 각기 그 自由를 守기만고 죠곰도 셔로 사양치 아니면 셰샹에 어지러운 날리 가이지 아니고 닷토는 바람이  치 아니야 天地間에 獸의 自由만 잇실지니라 그런고로 사람의 自由  道德과 法律에 合 연후에 비로소 잇나니… 明心  지어다 사람의 自由는 착 일에 잇고 약 일에 업시니 그런고로 갈오대 自由  自由치 못는 가온대에 잇나니라.

 

유길준이 {西遊見聞}에서 인민의 권리로서 自由와 함께 중시하는 通義란 한 마디로 말하자면 當然한 正理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곧 "千事万物에 其當然 道  遵야 固有 常經을 勿失고 相稱 職分을 自守 이 乃 通義의 權利"라는 것이다. 이러한 通義에 기반한 자유로운 행동이 이루어질 때 人間은 임의방탕으로 흐르지 않고 진정한 자유의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西遊見聞}에서 사용하고 있는 通義를 {勞動夜學讀本}에서는 道德과 法律로서 표현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에, 福澤諭吉은 通義를 단순히 영어의 right의 번역어로 쓰고 있는 것에 비해서, 유길준은 인권의 기반을 서양적 자유개념과 동양적 通義개념의 조화 내지는 복합화 속에서 찾으려는 어려운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유길준은 政治開化의 세 번째로서 19세기 후반의 조선에 바람직한 정치체제를 검토하기 위해서 각국의 정체를 ①군주가 擅斷하는 정체, ②군주가 명령하는 정체 또는 압제정체, ③귀족이 주장하는 정체, ④君民이 共治하는 정체 또는 입헌정체, ⑤국민이 共和하는 정체 또는 合衆政 로 분류하여 비교한 다음에 君民共治의 정체가 가장 훌륭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정체란 오랜 역사 속에서 국민들의 관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섣부른 변경을 시도하는 것은 어린애의 장난이 될 위험을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各國의 正 를 相較건  君民의 共治  者가 最美 規模라 니 然 則 何國이든지 其人民의 風俗과 國家의 景況을 不問하고 卽其政   取行흠이 可  듯 나 然나 決斷코 不然 者가 有니 凡國의 政   歷年의 久長흠으로 人民의 習慣을 成 者라 習慣의 卒然히 變改기 不態흠이 言語의 變改기 不能흠과 同一니 急遽 小見으로 虛理를 崇尙고 實情에 朦昧야 變改  議論을 倡起  者는 小兒의 嬉戱라 君國에 益이 有기  枯舍고 害를 胎흠이 反且不少 디라.

 

유길준 자신이 君民共治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도 구미의 다양한 정체들의 장단점을 꼼꼼히 따져 본 다음에 19세기 조선이 놓여 있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왕권강화의 필요성, 국민계몽의 필요성 등을 충족시키기 위해 조심스럽게 조선형 君民共治를 구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정치개화의 네 번째로서 정부의 직분을 새롭게 검토하고, 자기 나라의 정치를 안온케 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태평스러운 즐거움이 있게 하고, 법률을 굳게 지켜 국민들로 하여금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해야 하며, 외국과의 교섭을 신설하게 하여 국가로 하여금 분란의 걱정을 면하게 하는 세 가지 조항으로 대강령을 삼고,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통과 근대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를 조심스럽게 따지고 있다. 대표적 예로서 법률의 개화를 위해 새 법을 제정하고자 하더라도 고전적인 것들을 신중히 참고하여 증강하고, 개정하는 것을 줄기로 하여 윤색하는 조례들을 덧붙이며 국민의 관습에 맞도록 하여, 놀라움이 없게 한 뒤라야 안전한 境域에 이르고 문명한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유길준은 智德과 政法의 개화에 이어 마지막으로 器械와 상품의 개화를 들고 있다. 器械의 개화의 경우에는 외국의 器械를 사들이거나 기술자를 고용하지 말고, 반드시 먼저 자기나라 국민에게 기술을 배우게 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외국의 기계를 사들이게 될 때 그 기계가 못쓰게 되면 기계는 다시없게 되는 것이며, 기술자를 고용했을 경우 그 기술자가 본국으로 가버리면 다시는 그런 기술자는 없게 된다는 것이다.


상품의 개화의 경우에도, 19세기의 조선은 오랫동안 상업을 천시해 온 탓으로 이미 개화한 나라들에 비해 상품의 정보와 내용에서 크게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반드시 여러번의 단련이 있어야 비로소 경쟁해서 이익을 얻을 방책을 터득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III. 문명 개념의 동아시아 전파

 

19세기 조선이 국내 정치 사회세력들의 치열한 각축 속에서 구미의 근대 국제 질서를 문명이라고 부르는 과정에서 직접 영향을 받은 것은 일본으로부터였다.

 

19세기 동아시아와 서양의 본격적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1840-1842)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자신을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유럽을 새로운 문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중국이 유럽을 문명으로 부르기 위해서는 청일 전쟁의 패배라는 충격을 기다려야 했다.

 

한편, 17세기이래 네덜란드를 제외한 서양 세력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던 일본은 19세기에 들어서서 일본 연안에 접근하는 모든 외국 배들을 쳐부수라는 명령(異國船無二念打 令, 1825)을 내렸으며, 미도학(水戶學)의 아이자와 세이시사이(會沂正志齋)는 尊王攘夷를 新論(1825)에서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그러나 중국 중심 천하 질서의 주변에 놓여 있었던 일본은 중국과는 달리 거칠게 다가오는 유럽 중심 국제 질서에 대해 일방적으로 저항의 국제 정치만을 강조하는 대신에 활용의 국제 정치를 모색하기 시작하는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중국이 아편전쟁(1840-1842)의 참패를 겪는 것을 보면서, 일본에서는 양이파에 대한 개국파의 등장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변화를 대표하는 흐름으로서 佐久問象山은 18세기 新井白石의 「和魂洋才」를 뒤이어서 「西洋芸術, 東洋道德」을 강조하게 된다.

 

서양의 civilization 개념 자체는 幕末부터 明治초기에는 禮儀와 交際로 이해되다가 점차 번역어로서 문명과 문화가 함께 쓰이는 짧은 시기를 거쳐, 福澤諭吉을 비롯해서 西周, 箕作秋坪, 森有  등에 의해 文明開化 또는 文明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明治開明 지식인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福澤諭吉은 「唐人往來」(1865)에 이어 1868년에 출판한 「西洋事情外編」의 “世の文明開化”라는 절에서 인류역사를 蠻野에서 文明으로 진보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영국과 같은 유럽 국가를 문명 개화국으로 부르고 있다. 福澤諭吉은 다음해인 1869년에 출판한 「掌中萬國一覽」과 「世界國盡」에서는 일간들의 삶의 모습을 混沌, 蠻野, 未開/半開, 開化文明/文明開化의 네 부류로 나누어서 진보의 과정을 설명하고, 중국을 半開化로 미국과 유럽국가들을 文明開化로 분류하고 있다.

 

그는 1875년에 쓴 본격적 일본 문명론의 전개라고 할 수 있는 「文明論之槪略」에세 세계의 문명을 논하면서 유럽 국가들과 미국을 최상의 문명국, 터키, 중국, 일본 등의 아시아 국가들을 반개화국, 아프리카 및 호주를 야만국으로 분류한 다음에 이러한 분류의 상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반개화국가인 일본이 문명국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시간과 장소를 고려한다면 일차로 서양의 문명을 목표로 삼되 우선적으로 智德을 개발하고, 다음으로 政法을 개혁하고, 마지막으로 의식주나 기계를 추구해서 일본 독립을 획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福澤諭吉과 함께 明六社의 동인이었던 西村茂樹는 「明六雜誌」제 36호 (1875년 5월)에 西語十二解(一)로 “文明開化の解”를 게재하여 civilization 개념에 대한 계몽적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문명개화라는 개념은 岩倉使節團(1871년 11월-1873년 8월)의 구미 순방 이후 일본 사회에서 1870년대의 대표적 유행어로서 풍미하게 된다. 이러한 일본의 문명 개념은 1881년 6월부터 1882년 12월까지 福澤諭吉이 경영하는 慶應義塾에 유학했던 유길준을 비롯한 조선의 개화지식인들에 의해 당시 조선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특히 유길준의 조선 문명론인 「西遊見聞」(1887-1889)은 福澤諭吉의 「西洋事情」, 「學問의 勸奬」, 「文明論之槪略」을 종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유길준은 福澤諭吉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국내외 정치의 어려움 속에서 목숨을 걸고 조선 문명론을 고민하고 글로 써야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길준의 조선 문명론은 福澤諭吉의 일본 문명론에 비해 훨씬 조심스럽고 복잡한 전통과 근대의 복합화를 모색하고 있다.

 

19세기 조선의 문명 개념 도입이 일차적으로 개화지식인에 의해 일본으로부터 이루어진 후 이차적으로 문명 개념의 폭넓은 사용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戊戌政變(1898)의 좌절을 맛보고 일본으로 망명한 梁啓超가 일본 문명론의 영향을 받아 쓴 글들이 조선의 개신 유학자들에게 미친 영향이 컸다.

 

중국의 영국 주재 공사였던 郭嵩燾가 1876년 일기에서 서양에서 국가들을 civilized, half-civilized, barbarian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을 소개하면서 발음대로  色維來意斯得, 哈 甫色維來意斯得, 巴伯比里安이라고 쓰고 있다. 이 일기가 증명하는 것은 일본이 이미 文明, 半開, 野蠻 등의 번역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에 반해서, 중국은 아직까지 상응하는 번역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civilization의 번역어로서 文明을 사용한 것은 梁啓超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96년의 글에서 文明개념을 도입한 후 1899년부터 1905년까지 「淸議報」, 「新民叢報」에 단속적으로 연재했던 「自由書」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自由書」의 1절 “文野三界之別”에서 세계의 인류가 야만, 반개, 문명의 3단계로 나누어져 순서를 밟아 밝아 상승하는 것이 세계 인민 공인의 진화의 공리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써진 「民國十大元氣論(一名 文明之精神)」에서 중국의 문명화를 위해서는 「形質의 文明」대신에 「精神의 文明」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 문명론의 도움을 받은 梁啓超의 중국 문명론은 1900년대 초 단행본, 신문, 잡지등을 통해 조선의 개신 유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중에도 「淸國戊戌  政變記」, 「越南亡國史」, 「伊太利建國三傑傳」, 「中國魂」, 「飮氷室自由書」, 「十五小豪傑」등은 우리말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졌다.

 

따라서 19세기 중반 조선의 위정척사적 문명관과 문명개화적 문명관의 갈등은 20세기 초 일본을 전파경로로 하는 개화 지식인의 문명개념과 중국을 전파경로로 하는 개신 유학자의 문명 개념의 접근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Ⅳ. 유럽 문명 개념의 등장

 

일본이 문명으로 번역한 civilization은 유럽 근대 질서의 중심 세력이었던 불란서와 영국이 18세기 중반이래 그들의 삶의 진보성과 보편성에 대한 자기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용어는 어원적으로는 라틴어의 civis(시민), civilis(시민의), civitas(도시)에서 유래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와 로마제국의 삶의 차원에서 civitas는 야만과 문명을 구분지어 주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자신들의 삶의 양식을 라틴어로 도시화라고 부른다는 것은 도시밖의 야만에 대한 도시안의 문명에 대한 자기 우월감의 표현이었다.


Civilization이라는 용어가 오늘날의 문명의 의미로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757년에 불란서 혁명의 주요인물인 미라보의 아버지이며 중농학파의 일원이었던 미라보 후작에 의해서였다. 그 이후 불란서에서는 civilization이라는 용어가 1770년대에 들어서서 폭넓게 쓰이게 되었다.

불란서의 역사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프랑스와 기조(Fran ois Guizot)는 1828년에 소르본느대학에서 14회에 걸쳐 {유럽문명사(Histoire g nerale de la civilisation en Europe)}라는 제목으로 문명의 발달이라는 시각에서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의 유럽역사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에서 기조는 civilization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첫 번째의 중요한 의미로서 진보와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으로, 진보와 발전의 핵심적 내용으로서는 힘과 행복을 생산하고 분배하기 위한 사회의 발전과 능력, 감정, 생각의 면에서 개인의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기조는 문명의 양 측면 중에 사회의 진보 측면에서 불란서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의 역사를 검토하고 있다.

 

「유럽 문명사」에 이은 「불란서 문명사」(1828-1830)강의에서, 기조는 보다 구체적으로 영국은 사회의 발전이 개인의 발전을 앞서 있으며, 독일은 개인의 발전에 비해 사회의 발전이 뒤떨어져 있는 것에 반해서, 불란서는 사회와 개인의 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불란서를 유럽 문명사의 중심에 놓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불란서의 역사를 문명사의 틀속에서 조망하려는 기조의 노력은 불란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지식이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일본의 太政官 譯局의 室田充美가 불란서 원본을 1872년에 번역하여 1875년 「西洋開化史」라는 이름으로 印書局에서 발행하였다. 그러나, 일본 지식인들이 주로 읽은 것은 불란서 원본이나 室田充美의 번역본이 아니라 C.S. Henry 역(1842)과 W. Hazlitt 역(1846)의 영역본들이었고, 그 중에도 Henry 역이었으며, 특히 永峰秀樹에 의한 Henry 번역본의 중역이었다.

 

한편, 영국은 불어의 civilit 보다 넓은 뜻으로 civilit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란서보다 약간 늦은 1770년대에 들어서서 civilization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여 19세기초에는 일반화되었다. 그 이후 헨리 버클(Henry Thomas Buckle)은 1857년에 영국사를 문명사의 시각에서 본격적으로 분석한 {영국문명사(History of Civilization in England)}라는 미완의 대작을 발표하면서 진보의 핵심 내용으로서 도덕과 지성을 강조하고, 그 중에도 지성의 영향이 유럽 특히 영국의 문명화에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버클의 영국문명사는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에서 1874년에 「明六雜誌」와 「民間雜誌」에 처음 초역되었으며, 1875년에 정부 사업으로 공간되었다.

 

불란서와 영국이 자신들의 삶의 진보성과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 civiliz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근대국가 형성에 뒤늦었던 독일은 civilization 대신에 재배한다는 라틴어인 colore에서 유래해서 자연과 대칭되는 Kultur의 개별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면서 보편성을 강조하는 civilization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이러한 속에서 福擇諭吉을 대표로 하는 日本의 開明 지식인들은 기조와 버클의 영향속에서 자신들의 문명개화관을 형성하고 문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Ⅴ. 조선 문명화의 좌절

 

19세기 조선은 근대 서양 세력과의 만남에서 일차적으로는 서양을 문명이 아닌 금수로 부르고 전통적 부국강병의 자기 모색을 시도하게 되나 현실적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따라서, 저항의 국제정치 대신에 활용의 국제 정치를 추진하기 위해 중국형 문명화 모델의 수용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으며, 보다 뒤늦게 일본형 문명화 모델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일본형 문명화 모델에 자극을 받은 개화파 유길준은 조선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으로서 조선이 당명하고 있는 국내외 정치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통과 근대를 복합화한 조선형 문명화 모델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인해, 청국의 영향력이 비정상적으로 커지는 반면에 개화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노력을 행동이 아닌 「西遊見聞」이라는 글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유길준은 갑오개혁(1894)을 통해서 비로소 조선형 문명화의 실천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나, 첫째, 조선이 겪고 있었던 전통과 근대의 갈등, 둘째, 청일 전쟁 이후 청의 영향력 대신 급격하게 커지는 일본의 영향력을 현실적으로 견제하기 어려운 국제적 여건, 셋째, 국내 역량의 효율적 동원 실패, 넷째, 조선형 문명화 모델의 실천 전략적 취약성 등으로 19세기 조선의 문명화 모색은 좌절된다.

 

그 이후 고종을 중심으로 한 대한제국의 문명화를 위한 마지막 노력이 이루어졌으나, 결국 조선은 20세기 상반기에 종속의 정치 현실로서 일본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45년에 이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일본화의 종속으로부터는 벗어나게 되었으나,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냉전 질서의 형성과 함께, 한반도의 남과 북은 다시 한번 미국형과 소련형의 문명화 모델을 수용하게 되었다.

 

한반도가 냉전 질서의 어려움을 계속해서 겪고 있는 속에, 세계는 21세기를 앞두고 서서히 냉전의 역사를 벗어나서 탈근대 복합국가들의 부국 강병을 넘어선 복합 목표를 새롭게 추구하는 신문명의 가능성을 맞이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는 19세기 유길준이 꿈꾸었던 전통과 근대의 복합화라는 조선형 문명화의 길을 넘어서서 전통, 근대, 그리고 탈근대의 복합화라는 21세기 한반도형 문명화의 꿈을 새롭게 꾸어야 할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다.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