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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西遊見聞}
 

2001-08-21 

국제화와 세계화


목차 

Ⅰ. [세계화] 개념의 혼란

 

Ⅱ. 19세기의 국제화: 근대국민국가의 부국강병 추구

1. 'Civilization'과 문명(文明)
2. 전통과 근대의 복합화 모색
3. 국제화의 모색과 좌절

 

Ⅲ. 21세기의 세계화: 탈근대 복합국가의 복합목표 추구

1. 행위주체의 복합화
2. 활동목표의 복합화

 

Ⅳ. 자주적 세계화를 위한 지구주의적 민족주의

 


 
하영선입니다. 한림과학원 수요세미나에서는 오랜 연구와 현장체험을 하신 원로 선생님들이 발표를 하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저를 여기에 불러주신 것을  한편으로는 감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게 느꼈습니다. 따라서, 여러 번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어 한 번 이야기를 해보겠노라고 약속하고,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앉아 보니까 평소에 선생님으로 모시는 원로 선생님들도 계시고 해서, 마치 박사학위 논문 발표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Ⅰ. [세계화] 개념의 혼란

 

오늘 제가 말씀을 드리려는 주제는 "21세기의 {서유견문}: 국제화와 세계화"입니다. 이 주제는 좁게 보자면 저의 주 전공 분야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제가 조금은 아마추어적으로 주제를 다룰 위험이 없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좁은 전공분야로 보자면 21세기는 미래학자들이  다루어야 할 제목이고 {서유견문}은 19세기 한국 근대사를 공부하는 사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그 어느 분야에 대해서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제가 전문성을 가지고 발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단, 오늘 제가 시론적으로 말씀드려 보려는 것은 제목에서 보다시피 '19세기 속의 21세기,' '21세기 속의 19세기,' 또는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과거 속의 미래,' '미래 속의 과거'라고 하는 측면에서, 19세기의 {서유견문}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시각에 대해서는 21세기적인 차원에서, 또 반대로 미래학적으로 21세기를 보는 전문적 연구에 대해서는 19세기의 역사적 기반 위에서 21세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각도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접근이 경우에 따라서는 해당분야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전문가들에게 의외의 자극을 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다음으로 '21세기의 {서유견문}'의 부제로 국제화와 세계화의 제목을 붙인 것은  제 개인적으로 19세기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게 된 촉발요인과 관련이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저는 역사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뒤늦게 19세기를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저의 19세기에 대한  문제의식의 출발은 21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세계질서의 새로운 변화와 관련하여, 최근 3-4년 동안 국내적인 차원에서도 뒤늦게 세계화라는 말이 일종의 정치적 슬로건으로서 유행하고 또 그에 따라서 학계에서도 세계화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진행되어 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국제적인 차원에서는 지구화(globalization)에 관한 연구작업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내의 세계화 논의나 해외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구화 논의를 검토하여 보면, 논의하는 사람들간에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국내의 세계화 논의를 보면, 다양한 논의들이 세계화, 또는 세방화라는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에 대한 이해와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은 속에, 세계화에 대한 세 가지 오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세계화에 대한 첫 번째 오해는 세계화를 단순히 삶의 지리적 공간확대로서의 지구화로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근대적 삶의 중심 단위체인 국가가 21세기 신문명의 기준을 따라 잡을 수 있는 내부의 구조 재조정없이, 활동공간의 무분별한 확대를 시도함으로써 국가 자체의 부실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세계화의 두 번째 오해는 세계화를 19세기 중반이래 우리가 모색하여 왔던 국제화의 단순한 연장으로 보는 것입니다. 19세기의 국제화는 근대 국민국가의 부국강병 추구로 요약할 수 있으나, 이러한 노력만으로는 21세기 신문명의 중심국가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세계화의 세 번째 오해는 세계화를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로서 규정하고, 이에 따라 세계화를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주변국들이 중심세력에 의해 종속화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소극적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이 취하게 되는 21세기적 쇄국정책은 현실적으로 21세기 신문명의 새로운 변화를 따라잡기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세 부류의 논의를 보면서, 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구화나 또는 우리가 세계화, 세방화라고 부르는 21세기적인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국내외 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개념규정으로서 '복합화로서의 세계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개념은 얼른 감이 잡히지 않을 수도 있으나, 저는 복합화로서의 세계화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한반도의 국제화사를 추적하여 19세기의 국제화와 21세기의 세계화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선 21세기적인 문제의식에서 19세기를 분석하는 초보적인 작업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Ⅱ. 19세기의 국제화: 근대국민국가의 부국강병 추구

 

19세기는 잘 아시다시피 유럽의 근대국제질서가 전세계로 확산됨에 따라 전통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질서 속에 살아왔던 조선으로서 커다란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그 새로운 삶의 질서의 모습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고민은 우리가 21세기에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삶의 질서를 어떻게 개념화하거나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과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이러한 속에, 저는 19세기의 변화를 21세기의 세계화와 구별하여 국제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제화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동아시아의 국제화를 담기 위해 당시 새로운 언술체계로서 등장한 '문명개화'에 대한 심층적 분석이 필요합니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19세기 당시 상황에서 동양이 전통적으로 야만으로 불렀던 서양을 밝은 의미의 문화, 즉 '문명(文明)'으로서 받아들인 것은 혁명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문명', 또는 '문명개화'라고 하는 말이 어떻게 쓰이기 시작하여, 보다 본격적인 언술체계로 자리잡게 되었는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Civilization'과 문명(文明)

 

잘 아시다 시피, 문명, 또는 문명개화는 civilization의 번역어입니다. 이 용어는 1757년 프랑스 혁명의 주요 인물이었던 미라보 백작의 아버지(Marquis de Mirabeau/Riqueti, Victor, 1715∼1789)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프랑스 혁명 전후에는 폭넓게 퍼져 나가는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civilization의 어원은 도시 밖의 야만인에 대비되는 도시민을 뜻하는 라틴어 civis의 형용사인 civilis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18세기 당시에 프랑스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문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자신들의 사고나 행동이나 제도를 어원적으로 도시인화한다(civilize)는 것의 명사형(civilization)으로 부르기 시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사고·행동·제도의 중심성 또는 보편성의 자기인식의 표현으로서 로마에서 도시의 밖과 안을 기준으로 야만과 문명을 구분하는데 사용하던 언어를 빌려 당시 프랑스적인 삶의 모습을 문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 점차 확대된 것입니다.


문명사적 시각의 선구자로서 일본의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 1835∼1901)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기조(Fransois Pierre Guillaume Guizot, 1787∼1874)는, 문명사적인 차원에서 프랑스를 보는 유명한 "유럽문명사(Histoire de la civilisation en Europe depuis la chaute de l'Empire romain jusqu'  la R volution fran aise, 1828)"에서 프랑스의 중심성, 보편성에 대한 자기 우월 의식의 표현으로서 문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유럽 내에서도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 약간 뒤늦었던 독일에서는 자기 삶의 보편성이나 중심성을 강조하는 문명개념과 대비하여 자기 삶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문화(Kultur)라는 개념이 적어도 19세기 중반까지는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동양 3국이 바라보면서 전통적으로 '야만'이라고 불렀던 서양을 드디어 '문명'이라는 번역어로서 가장 먼저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일본이었습니다. 그 대표적 예로서 후쿠자와 유기치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西洋事情外編}(1868), {掌中萬國一覽}(1869), {世界國盡}(1868), {學問のすすめ}(1872-1876), {文明論之槪略(1875)} 등에서 서양문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西洋事情外編}에서 단순한 서양사정 소개에 그쳤다고 한다면, {文明論之槪略}(1875)에서는 비교적 본격적인 서양문명의 상대화를 모색한 다음에, 일본문명의 위상 설정에 대한 자기 나름의 논리 전개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구체적으로 들고 있는 것은 지덕(智德)의 개혁과 정법(政法)의 개혁, 의식주나 기술의 개혁·개화이며, 이런 것들의 자기모색과 개선을 통해서 일국 독립이 이루어져야 일본은 또 하나의 문명으로서 자기 나름의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그 나름의 일본문명론입니다. 일본에서 이렇게 수용된 서양의 문명 개념은 19세기말 조선의 유길준의 글 속에서 다시 한 번 변용되어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 전통과 근대의 복합화 모색

 

19세기 조선의 경우에, 서양을 문명이라는 표현으로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유길준(1856∼1914)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길준의 저작들을 보면, 그는 1880년대 초반 일본유학 초기에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 1835∼1901)가 발행하는 신문에 썼던 {신문의 기력을 논함}에 처음 문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1870년대에 문명이라는 용어가 상당한 유행어로서 사용되던 분위기였습니다. 다음으로 1883년의 {세계대세론(世界大勢論)}, 그리고 보다 본격적으로 1887-1889년에 쓴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는 그 나름의 문명론을 전개하게 됩니다. 이것에 관한 사학계의 연구들을 보면 유길준의 글은 독창적이라기 보다 집술한 것이며, 그 중에도 상당한 부분은 후쿠자와 유기치의 글들의 번역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정치학적 입장에서는 그 중의 몇 %가 번역이냐의 중요성보다는 당시 조선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유길준이 서양을 '야만'에서 '문명'으로 부르는 과정에서 후쿠자와에 비해서 얼마나 더 힘든 지적 번민을 겪을 수 밖에 없었던가를 밝히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합니다.


동아시아를 오랫동안 지배하였던 중국적 질서 속에서 상대적으로 주변에 놓여 있던 일본은 우리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상황 속에서 서서히 '서양'을 '문명'으로 부르고 문명개화의 길로 접어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유길준은 잘 아시다시피 미국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한규설 집에 가택연금 상황에서 비공식적인 대외관계 자문의 역할을 하다가 결국 민영익의 도움으로 취운정 별장에 자리잡은 후 약 1년 반-2년 가까운 기간에 {서유견문}을 썼다고 하는 자체가 당시의 대단히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 서양을 문명으로 부를 수 밖에 없던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19세기의 국제화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우선, 서양에서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문명 즉 밝은 문화라고 자신감있게 보편성을 강조하여 쓰기 시작하고 그것이 서세동점해서 드디어는 일본이 그것을 '문명'이라는 한자어로 번역하여  받아들이고, 그것이 다시 유길준 등의 개화 세력에 의해 조심스럽게 조선에 전해지게 되는 과정을 설명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일본과 조선은 상당히 다른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서유견문}이나 다른 저작들을 통해 일본의 메이지 지식인들과는 다른 유길준의  고민을 만나게 됩니다. 유길준은 서양과의 만남에서 '전통과 근대의 딜레마'를 강하게 느끼고, 이 딜레마를 '조화', 또는 '복합화'의 자기모색을 통해 풀어보려는 힘든 노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서유견문} 20편중에 상당한 부분은 서양사정을 소개하는 부분이지만, 간헐적으로 자신의 서양관을 드러내는 장절(章節)들을 중심으로 문제를 보면, 그는 개화를 실상개화(實狀開化)와 허명개화(虛名開化)로 나누고, 아주 직설적인 표현으로 개화의 죄인, 개화의 원수, 개화의 병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전통 없는 근대를 모색하는 사람들을 개화의 죄인으로, 이와 반대로 근대 없는 전통을 모색하는 사람들을 개화의 원수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좋은 것을 버리고 남의 나쁜 것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개화의 병신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유길준의 이러한 입장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개화론과는 일정한 편차가 있으며 '개화'나 '수구'를 넘어선 진지한 자기모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유길준이 서양을 '문명'이라고 부르는 경우에 그 기준은 무엇이었으며 또 왜 그것을 밝은 문화 즉 '문명'이라고 불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시 문명의 기준을 무엇으로 받아들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표현을 바꾸자면, 19세기의 국제화는 단순한 지리적 공간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문명기준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19세기의 국제화는 19세기 국제질서 속에서 하나의 독립된 단위체로서 살아남기 위해 추구해야 할 모델을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은 구체적인 정치 단위체의 생존전략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당시 일본보다 국내외적으로 훨씬 어려웠던 조선의 분위기 속에서, 유길준이 나름대로 고민하는 속에 '문명'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면서 무엇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어떤 개혁 모델을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길준은 여섯 분야의 개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행실의 개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둘째로는 학술의 개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정치의 개화, 네 번째, 법률의 개화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기계의 개화, 여섯 번째로 물품의 개화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즈음 말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개혁 프로그램에 해당하는 것으로 후쿠자와의 {文明論之槪略}에서 사용하는 분류와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文明論之槪略}의 집필에 커다란 영향을 준 프랑스의 기조나 영국의 버클(Henry Thomas Buckle, 1821-1862)은 19세기에 각각 프랑스와 영국의 역사를 문명사의 각도에서 쓰면서 프랑스와 영국의 삶을 문명(civilization)으로 부르는 준거의 틀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향을 크게 받은 후쿠자와는 {文明論之槪略}에서 지덕의 개화, 정법의 개화, 의식주나 기술의 개화 등 이른바, 3대 개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3대 개화론과 유길준의 6대 개화론을 구성명에서 비고하여 보기 위해, 행실과 학문을 지덕과, 정치와 법률을 정법과, 그리고 기계와 물품을 의식주와 기술과 대비시켜 본다면, 두 모델의 구성에는 상당한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길준이 여섯 분야의 개화를 {서유견문} 에서 서술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우리의 전통과 근대의 딜레마가 일본보다 훨씬 뿌리 깊고, 또 유길준이 겪어야 했던 국내외 정치 환경의 어려움 때문에, 일본과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로서, 행실의 개화 경우에 후쿠자와는, 유학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을 시도하고 있습니다만, 유길준은 철저히 오륜(五倫)에 기반할 것을 강조하고 있고, 오륜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행실의 개화 경우에, 우리의 행실을 변형하거나 서양의 행실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는 없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정법의 개화 경우에는, 유길준은 서양 모델의 일정한 수용과 자기 변모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정법의 개화에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국제 정치 공간에서 살아 남기 위해 당시의 조선이 국가의 권리, 또는 일국의 자주성을 어떻게 모색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이러한 문제에 관한 글들은 시대적 상황을 예민하게 반영할 수 밖에 없는데, 1880년대의 국내외 상황이 긴박하게 변화하고 있는 속에 1883년에 쓰여진 {세계대세론}이나 1885년의 {중립론}, 1887부터 1889년에 걸쳐 쓰여진 {서유견문}들은 모두 이러한 면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서유견문}은 당시 조선이,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이후에 소위 양절체제(兩截體制)의 어려움을 겪는 시기에 쓰여졌습니다. 우리가 근대 국제질서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서양 제국과 개국통상을 이루어나갑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청국의 강한 영향력이 전통적인 사대질서를 넘어서서 작동하게 됩니다. 청의 직접적 영향이 심한 경우는 고종폐위론까지로 나타날 수 있을 정도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유길준은 방국(邦國)의 권리를, 혹은 한 나라의 삶을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 가를 써야 했기 때문에 글 자체도 상당히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겠죠. 이런 상황 속에서 유길준은 이중적인 모색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글을 보면, 우선 청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근대 국제 질서 속에서 설 위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고, 이를 위해서 당시에 많이 논의되었던 만국 공법(국제법)의 논리를 빌어서 자주의 권리를 주장하되, 동시에 청과의 관계를 전통 관계로부터 근대적인 관계로 전환시켜야 하는 명분화에 골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대 질서 속에서 중국과 조공 관계를 가졌다고  하지만, 이러한 증공국과 수공국의 관계는 속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길준은 양절체제(兩截體制)의 어려움 속에서 일국의 독립, 또는 자주를 모색하기 위해 근대적 만국공법 질서와 제대로 된 전통질서의 점진적 개선을 기반으로 하는 국제정치론을 강하게 주장하게 됩니다. 정법의 개화에서 두 번째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인민의 권리 즉 민(民)의 권리에서 나타나는 전통과 근대의 딜레마입니다. 유길준은 자유와 통의(通義)라고 하는 두 개의 개념 위에서 개인(인민)의 권리가 행사되어야 한다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후쿠자와가 서양의 자유 개념을 직접 도입한 반면, 유길준은 보다 전통적인 통의 개념에 의해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는 것을 규제하여, 자유와 통의를 인민의 권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정치 체제의 개혁을 위해 유길준은 서양의 정치체제를, 후쿠자와나 카토와 같은 메이지의 개명(開明) 지식인들의 글에 힘입어, 군주제부터 공화제까지로 나누어 소개하고, 갑신정변 이후의 국내외 상황 속에서 군주제의 강화, 인민의 계몽이 더 이루어져야만 개화가 가능하므로 조선형의 군민공치(君民共治)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공법의 개화에서 유길준은 정부의 역할을 전통과 근대의 갈등 속에서 어떻게 재규정하느냐 하는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얼른 보기에는 {서유견문}이 단순히 서양의 삶을 소개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과감한 해석일 수도 있겠으나, 유길준의 고민은 서양이라는 새로운 문명 기준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전통과 근대의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수 없을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우리가 전통적으로 살아왔던 삶의 질서는 국제질서 차원에서 보면 천하(天下)라고 하는 단원적 질서 속에서 명분론적으로는 적어도 예(禮)가 행동의 목표로써 작동하는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속에서, 서양의 근대 국제질서는 근대 국민국가라고 하는 단위체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고 하는 이색적 목표를 추구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문명의 기준을 한국적으로 어떻게 수용할 것이냐, 한국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삶의 체제 속에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이냐에 대한 유길준의 고민을 이해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은 19세기의 국제화의 모습입니다.


3. 국제화의 모색과 좌절

 

19세기 국제화는 전통적이고 단원적인 질서 속에 禮를 추구하여 왔던 정치단위체가 근대 국민국가의 부국강병 추구라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어떤 형태로 접합시킬 것인가 하는 자기모색의 과정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19세기말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 결국은 좌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성공했다면 우리는 20세기의 역사를 식민지의 모습으로 맞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길준의 경우도 갑신정변 이후 1894년의 갑오개혁의 짧은 기간을 통해서 개혁 프로그램의 추진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시도를 해보게 됩니다만, 결국 좌절할 수 밖에 없었던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국제정치학도로서 19세기 후반을 들여다보면서 이러한 개혁의 시도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좌절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3중의 딜레마 때문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첫 번째, 국제정치 공간에서 조선이 청일 전쟁 이후 양절체제(兩截體制)의 한 부분이었던 청으로부터는 벗어났으나,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메커니즘의 창출에 실패하였으며, 두 번째는 국내의 역학관계가 청일 전쟁 이후에 친러파, 친일파, 친미파  등으로 다양하게 갈라지는 속에서 국내 정치 세력의 단합에 현실적으로 실패하였으며, 세 번째, 보다 근원적으로는 사회(社會)나 인민들은 전통적 바탕에서 서양의 근대 모델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갈등을 쉽사리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속에서 3중고를 뛰어넘을 수 있는 고도의 실천 전략이 충실하게 마련되지 않은 개혁 프로그램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의 국제화는 결국 좌절하고 일본화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20세기 상반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Ⅲ. 21세기의 세계화: 탈근대 복합국가의 복합목표 추구

 

비교적 자세하게 19세기의 국제화를 말씀드린 궁극적인 목적은 21세기의 세계화의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여 19세기의 좌절한 국제화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21세기의 성공하는 세계화 모델을 설정하고 그것을 추진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복합화로서의 세계화가 단순히 한 정권의 단기적인 정치 슬로건이 아니고 21세기 또는 22세기 한반도의 삶의 목표가 되게 함으로써 새로운 문명의 기준을 충족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 논의의 초점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유길준이 19세기 중 후반에 서양을 바라다보면서 {서유견문}을 썼던 것처럼, 21세기의 세계를 바라다보면서 {신서유견문}을 구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신서유견문}의 내용이 유길준의 {서유견문}의 20편 장절과 비교해서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며 전략적으로 추진되어야 하는가가 문제의 핵심입니다.


제가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19세기의 국제화는 '근대 국민국가의 부국강병 추구 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21세기의 세계화는 '탈근대 복합국가의 복합목표 추구' 모델로서 설정할 수 있습니다.


1. 행위주체의 복합화

 

21세기에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사의 변모를 어떻게 부를 것이냐, 어떤 언술체계나 담론(discourse)으로 담을 것이냐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서양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오늘날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 시절을 근대의 단초로 부르는 것도 마키아벨리 시절 이후 거의 3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대체로 그 시기를 중세와 구분해서 근대로 설정하는 쪽으로 합의가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따라서 냉전이 끝나고 탈냉전의 지구사적인 변화 속에서 21세기를 맞이하는데 과연 이 시기가 문명사적인 구분을 할 시기인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은 아마도 1-2세기가 지난 후에 비로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국제정치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오늘의 현실 변화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언술체계로 담아야 할 것이라는 제 나름의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자면, 우선 행위주체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근대의 새로운 행위 주체로 등장했던 근대국민국가가 21세기를 맞이하면서 밖으로는 지역화와 지구화, 그리고 안으로는 지방화와 개별화의 새로운 변화를 겪으면서 행위 주체의 복합화라는 새로운 변모를 보여주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서양 중세에는 지방단위체인 봉건체제와 초국가 단위체인 로마 교황청이나 신성로마제국으로 이중화된 속에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가, 근대에 들어서면서 근대 국민국가라는 새로운 단위체가 창출되었듯이,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지난 4-5백년 동안 건강을 자랑했던 근대 국민국가가 탈근대 복합국가로의 새로운 변형을 겪게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근대국가가 쉽사리 해체되리라는 것이 아니고 변형의 차원에서 근대국가가 통합과 분열 또는 지구화와 지방화를 품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근대국가가 겪고 있는 전형적인 변화의 하나는 유럽연합(EU)같은 지역화 추세입니다. 좁은 의미의 국제정치를 공부하는 미국 학자들은 EU의 장래에 대해서 상당한 견해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현실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EU를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진 단위체로서 분석해야 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 많은 논란을 벌이고 있습니다. 제 입장에서 보자면, 근대 국민국가가 외적으로 어느 정도의  통합적 변화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에, EU는 장기적인 시각에서 근대국민국가의 긍정적인 요소를 유지하되 부정적인 요소를 완화 또는 조절하기 위해서 새로운 모델의 이중 구조적인 단위체로 서서히 변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지역화와 더불어, 더 바깥으로는 지구화로 개념화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경제적 차원의 전형적 변화로서 WTO의 형성이나, 또는 대표적인 국제기구인 UN의 역할이 탈냉전기에 강화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안쪽의 모습에서도 근대국민국가는 그 나름의 상당한 변모를 겪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지방화의 변화이며, 보다 더 나아가서는 개별화, 즉 개인의 단위체로서의 역할 증대입니다. 따라서 근대에 들어서서 국민국가가 그 나름의 역사적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으나 동시에 근대의 자기 모순, 가령 전쟁의 강도가 더 강화되어 드디어 핵무기까지 등장하게 되는 안보적인 차원의 딜레마, 경제적 차원에서의 일국 중심의 번영을 추구하는 부국이 만들어내는 국제경제질서의 문제,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민족문화 갈등, 환경문제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따라서, 근대국가의 자기변모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바깥으로 일어나는 지역화나 지구화와 같은 통합적 변화를 품어야 하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동시에 근대국민국가는 안에서 생겨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방화, 그리고 개별화라는 새로운 변화들을 품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근대국가의 자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탈근대 복합국가의 건설이라는 새로운 안목이 필요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세계화를 국제화로 해석하는 것은 19세기 모델을 21세기에 실천하려는 자기한계를 가지고 있고, 또 다른 면에서 세계화를 단순히 국경없는 경제형태의 지구화로서 받아들이는 경우에는 유길준의 표현을 빌린다고 한다면, 다시 한 번 개화의 죄인의 잘못을 범하게 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특히 한반도적 상황 속에서는 우리가 19세기 국제화의 좌절 속에 21세기의 새로운 세계화의 모델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19세기의 전통과 근대의 숙제를 다 풀지 못한 것을 잊어버리고, 성급하게 21세기의 숙제를 풀어보려는 무모한 시도를 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9세기의 숙제와 21세기의 숙제를 동시에 풀기 위해서는, 행위의 기본 단위체로서 근대국가라는 기반을 통해 안과 밖으로 일어나는 변화를 효율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단위체의 복합화가 세계화의 모델 설정에서 첫 번째로 중요하며, 21세기 {신서유견문}의 핵심적인 장절(章節)을 차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복합국가화된 단위체가 추구해야 할 목표 자체도 국제화에서 설정했던 것과는 상당히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 활동목표의 복합화

 

우리 국내에서 세계화의 상식적인 이해는 우리 물품이 세계적으로 잘 팔리는 것이며, 이러한 인식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은 부국강병을 통한 국제경쟁력 강화입니다. 대학 차원에서는 세계화라는 명목으로 상상수의 국제 대학원이 신설되고 있는데, 이들의 강의 과목과 내용들을 보면 그것은 21세기의 세계화가 아니라 19세기의 국제화를 위한 것입니다. 교육 내용을 국가 중심의 경제 제일주의로 짜는 것은 19세기 유길준이 다니는 대학원이라면 바람직할지 모르지만, 21세기의 새로운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명기준을 따라 잡도록 짜야하며, 더 나아가서는 신문명의 기준을 언젠가는 한반도가 설정해야 한다는 장기적인 포부를 가지고 교육내용을 짜야 할 것입니다. 제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부국강병이라는 19세기 국제화의 목표 자체가 21세기의 세계화에 맞게 복합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세기의 국제화 숙제를 다 풀지 못한 우리에게 부국강병은 분명히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새로운 활동목표가 충분조건으로 거의 대등하게, 또는 보다 절실하게 추진되어야 합니다. 21세기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부국강병을 포함한 7, 8개의 복합 목표가 설정되어야 합니다. 강병 모델도 단순히 근대적 의미의 모델로서는 더 이상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군사적인 기반은 탈근대국가에서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것이 일국의 개별 안보만을 추구하는 것으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딜레마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유럽에서 이미 현실로서 보고 있는 것과 같이 국제안보와 국가안보를 차질 없이 상호 보완시키려는 공동안보의 고민을 우리도 하루빨리 시작해야 합니다. 한반도는 지금 남북 분단의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단기적으로는 근대적인 목표로서 남북의 문제를 풀 수 밖에 없습니다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동아시아의 지역안보와 한반도의 개별안보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 하는 문제를 고민할 수 밖에 없고, 부국강병의 부국도 바깥으로는 이미 지역이나 세계의 번영과 갈등되지 않는 속에서 그것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의 경제적 삶이 현실적으로 세계무역기구(WTO)나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와 직접적으로 연계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내적인 차원에서도 부민(富民), 즉 복지와 연결되지 않은 부국은 21세기에 더 이상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21세기 부국강병의 모델은 19세기의 부국강병 모델과는 다르게 설정되어야 하고, 그것을 넘어선 새로운 목표들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부국의 일부로서 취급되어 왔던 첨단과학 기술화의 상대적인 자율성을 높여서 보다 핵심적이고 독립적인 목표로서 설정해야 하며, 동시에 최근에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정보화, 최근 국제정치학에서 활발하게 논의가 시작되고 있는 다문화주의 내지는 복합문화주의를 필수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복합문화화의 논의는 각 개별 단위체의 문화와 지구적 차원의 삶의 양식이 어우러져서, 전통과 근대, 또는 그것을 넘어선 탈근대가 하나로 되어 단순히 과거의 전통문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래 문화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아닌 문화의 복합화는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21세기의 세계화를 위한 또 하나의 중요 과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생태균형(ecological balance)입니다. 생태균형의 대국이 되지 않고서 21세기 문명의 중심권에 서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과제로서 인적자원(human- capital)을 고급화하기 위한 남녀, 노소, 교육의 문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7개 영역에서 나타나는 갈등을 해소해 나가는 국내 체제가 민주화되지 않은 단위체는 21세기의 대국으로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우리는 소련의 해체를 들 수 있습니다. 저 자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우선 평화화, 번영화, 첨단과학기술화, 정보화, 복합문화화, 생태균형화, 고급인력화, 민주화라는 8대 과제의 복합 모델을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 단계로서, 이러한 모델을 입체적으로 어떻게 구조화하고 작동시키느냐하는 것은 좀 더 많은 생각할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위체의 복합화'와 '활동 목표의 복합화'로서의 세계화라는 초보적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21세기의 세계화를 19세기 유길준의 국제화로 오해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하루빨리 고쳐나가기 위한 것입니다.


Ⅳ. 자주적 세계화를 위한 지구주의적 민족주의

 

19세기의 유길준이 {서유견문}과 일련의 저작을 통해서 이제 우리는 싫으나 좋으나 서세동점하는 속에서 서양의 좋은 것, 효율성이 있는 것을 전통과 접목시켜서 받아들여 서양을 따라잡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주장을 한 것이라고 한다면, 21세기를 앞두고 제가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은 21세기의 문명기준이 새롭게 바뀌는 속에서 그것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또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유길준은 새로운 모델의 가능성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현실 정치공간에서 모델의 현실화에 실패하였습니다. 제가 관악산에 앉아서 21세기의 구상을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현실의 전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우리 나라가 활동 목표를 새롭게 설정하고,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19세기 국제화의 좌절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고도의 실천 전략이 필요합니다.


결국, 국제 정치·국내 정치·남북 분단의 공간에서 어떤 실천 전략이 마련되어야, 21세기 세계화 모델이 현실적으로 추구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 문제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활동 목표의 복합화의 구체적인 모델 개발보다 훨씬 어려우나, 모델의 현실화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한반도의 성공적인 21세기 세계화를 위해서는 언술체계적인 차원에서는 자주적 세계화를 위한 지구주의적 민족주의라고 하는 목표설정이 필요합니다. 근대적 시각에서 보자면, 자주와 세계화, 지구주의와 민족주의는 서로 상충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21세기의 질서를 주도하는 문명권은 근대적인 이분법을 넘어서는 사고, 행동체계, 그리고 제도를 기반으로 근대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집단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자주화와 세계화를 어떻게 엮어낼 것이냐, 지구주의와 민족주의를 어떻게 복합화할 것이냐 하는 것이 논의의 핵심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행동의 단위 차원에서 말씀드려 본다면, 첫 번째로는 국내 개혁적 차원의 문제, 두 번째로는 남북통일이라는 한반도 차원의 문제, 세 번째는 동아시아적 차원의 문제, 네 번째는 세계적 차원의 문제를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내 개혁 차원에서 제가 한 가지만 말씀드리려는 것은, 19세기 모델의 설정이  유길준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전통과 근대의 조화나 복합화의 좌절로 나타났기 때문에 21세기에는 전통과 근대와 탈근대의 복합화의 모색이라는 새로운 개혁 프로그램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성공 여부는 앞서 말한 8대 목표의 국내적 기반을 어떻게 창출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 속에서 유길준의 과오를 다시 범하지 않으려면, 구체적으로 국내 정치·사회 공간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정치 사회 세력 중에 어떻게 주도세력을 형성해 나가느냐에 대한 실천적인 논의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 통일 차원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제까지 남북한 통일의 모습을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통일로 생각해 왔습니다. 물론 이것이 통일의 문제에 접근하는 일차적인 시각이긴 하지만 보다 장기적 차원에서 보자면, 탈근대 복합국가로의 통일을 동시에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제까지 논의되어온 북한의 연방제나, 국내 정치인들이 말하는 연방제를 넘어선 새로운 의미의 단위체의 모습으로, 한반도 차원에서 남과 북의 21세기적 연방을 새롭게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동아시아 차원에서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유길준의 꿈이 좌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청으로부터 벗어나는 반면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할 수 없었다고 하는 딜레마였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동아시아 공간에서 우리가 생존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미·일과 중국의 갈등을 내재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역학 구조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미·일 쪽으로 기울어지면 중국이 섭섭해하고, 중국 쪽으로 기울어지면 미·일이 섭섭해하는 상황 속에서, 한국의 과제는 어떻게 쌍방을 다 섭섭하지 않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단순히 19세기적인 국제화의 세력 균형적인 시각의 모색만으로는 쉽게 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필요조건으로는 세력 균형적 안목에서 미·일을 본처로 삼아야 하지만 동시에 중국을 애인으로 삼아 섭섭하지 않게 해야 하는 일종의 불륜의 국제정치학이 불가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한국이 미·일을 조강지처로 삼으면서도 중국을 버릴 수는 없는 딜레마에서 양쪽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오히려 양쪽을 좌우로 품을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유럽의 네덜란드나 기타 소국들은 좋게 말하면 활용의 국제정치, 나쁘게 말하면 불륜의 국제정치를 통해서 상대적 자율성을 확대하고 있는 반면에, 북한은 주체의 국제정치를 통해서 비주체의 국제정치를 맞이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도 활용 또는 용외세의 국제정치라는 21세기의 커다란 숙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유길준이 청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동시에 일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안목을 기르지 못했던 것과 비교하여 우리가 21세기적 활용의 국제정치를 개발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며, 이러한 면에서 보자면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우리의 안목이 19세기 당시의 유길준의 안목보다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현실적으로 한반도가 동아시아에서 성공적인 생존전략을 추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미국, 일본, 중국, 그리고 잠재적인 러시아라고 하는 주변 4강에 둘러 쌓여 있는 한반도는 실제 4강을 모두 껴안아야 하는 대단히 벅찬 상황 속에서 세력균형의 모색도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일·한의 경우에도 미국이 일본과의 이해가 훨씬 더 깊은데, 미국이 한국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도록 만드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근대적 의미의 세력균형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의 대안으로서 동아시아 공간으로부터의 탈출이 필요하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아시아에서 자기 위치를 설정하기 위해서 활동 공간을 더 확대시킬 수 있는 역량을 어디서 빌려올 것인가 하는 또 하나의 숙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따라서 그것은 근대적 의미의 세력균형을 넘어선 탈근대적 공간 개념에서 공간 전체를 활용하는 것이고 활동 영역에서도 근대적인 활동영역뿐만 아니라 탈근대적 활동영역까지를 어떻게 극대화시켜나갈 것인가 하는 숙제를 풀 수 있는 전략의 완성이 이루어 질 때, 19세기에 전통과 근대를 복합화하려 했던 유길준의 좌절된 꿈이 21세기에 전통, 근대, 그리고 탈근대의 복합화라는 모습으로 현실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린 것은 19세기 중반이래 21세기까지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3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삶의 모습을 문명의 국제정치학 시각에서 검토하고 있는 개인적 작업의 중간보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공부가 아직 충분히 익지 못해서 설명이 부족한 면이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아직 해답을 찾지 못한 고민을 솔직하게 고백한 것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토론 내용

 

질문: 21세기의 세계화의 전반적인 추세가 탈근대 복합국가화라는 점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복합목표를 추구하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는데, 선생님께선 부국강병의 원형은 19세기적인 사고이며, 20세기 21세기에는 그것에 대한 수정·보완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감을 하지만, 한편으로 '행위주체의 복합화'와 '활동목표의 복합화' 이런 것도 제가 보기엔 부국강병으로 보이는데 세계가 아무리 바뀌어도 활동목표의 복합화하기 보다는 그런 부국강병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의 복합화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러니까 시대가 바뀜에 따라서 여러 가지 환경이 바뀌고 환경과 시대가 바뀜에 따라서 그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다 보니까 지구화, 지역화, 또 평화와 번영이 나오고 사실 따지고 보면 첨단 과학기술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부국강병을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정보화도 사실은 앞으로 21세기에 부국강병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다원화이지 목표의 다원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도 다시 한 번 거슬러 올라가 보면, 부국강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환경문제도 색다르게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만, 환경문제도 이렇게 봅니다. 과연 인간이 빵 한쪽을 더 있었을 때, 행복함을 느낄 때가 있고 빵보다는 깨끗한 공기를 마셨을 때 행복감을 느낄 때가 있는데, 행복과 부국이라는 것이 어떻게 연결될지는 모르지만, 사실 요즘은 빵 한 쪽보다는 깨끗한 공기가 돈이 되고 깨끗한 물이 돈이 되는 시절에 궁극적인 부국강병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의 다원화이며, 이미 지적하셨듯이 동구의 붕괴도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받아들여서 사회주의를 개혁해 보았지만, 결국은 정치적인 민주화가 없이는 부국이 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소련이나 동구가 도미노적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면 제 생각엔 부국강병이라는 기본적인 틀은 절대 변화가 없고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활동목표가 아니라 수단의 다원화라고 생각합니다. 고급인력의 양성과 민주화의 목표도 부국이 아닌가 싶고, 결국은 복합목표의 추구라기 보다는 단일목표 추구의 목표달성을 위한 수단의 다원화라고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답변: 글쎄요, 김교수님의 지적이 한편으로는 적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답변을 할 수 있는 부분도 있겠습니다. 제가 부국강병의 목표가 바뀐다고 한 것은 근대국제질서 속에서 근대국가가 지향하는 목표로서, 동아시아에서 명분론적인 차원의 '예(禮)'가 활동 목표였던 것에 비해서, 부국강병이 설정되어졌는데, 그것을 계속적으로 추구하는 경우에 근대국가는 명백히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따라서 근대국가는 일국 중심의 부국강병 모델을 추구하는 경우에 부딪치게 되는 자기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일정한 자기 변모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금 바꾸어서 이야기하자면, '21세기형 부국강병이란 무엇이냐?'하는 것인데, 이미 부국이라고 하는 표현이 적절치 않다는 것입니다. 부국을 추구하는 경우에 우리가 전형적으로 부딪히는 슈퍼 301조나 WTO 체제를 일방적으로 적대시하기보다는 활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강병의 모델도 이미 유럽에서는 군사 체제 자체의 자기변모를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단 체제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전형적인 근대모델을 일정 기간 유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단체제 이후의 강병 모델은 방어적 형태의 군사체제로 전환되어야 하고, 지역안보체제와 연계되어져야 하고, 동시에 지구안보체제와도 연계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21세기의 복합국가도 현실적으로 근대국민국가를 기반으로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그 면에서는 제가 소개 드린 8개의 국가활동 목표를 재구성해야 할 부분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21세기의 국가 목표가 19세기 부국강병과 마찬가지가 아니냐 라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부국강병이라는 용어를 21세기의 활동 목표로 그냥 쓰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공부하는 국제정치학에도 격렬한 논쟁이 있습니다. 예컨대, EU의 변화에 대해서도 겉으로 보기엔 새로운 지역단위체의 탄생인 것 같지만, 그 속에서 근대국가라는 개별 단위체의 상대적인 자기 이익의 치열한 각축이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에, EU의 상대적 자율성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버리는 것이 좋다고 보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EU의 변화를 새로운 단위체의 준혁명 과정으로 보는 입장들이 있습니다. 저는 일부 학자들이 사용하는 '근대국민국가의 죽음'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고, 최근 어느 유럽 학자의 논문제목인 '과장된 국민국가의 죽음(exaggerated death of nation state)'이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국민국가는 아직도 역사적 소명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나, 동시에 21세기에는 근대국가의 자기 한계성이 도처에서 표출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추세를 새롭게 받아들이고, 품을 수 있는 새로운 표현이 필요합니다.


질문: 요약해서 두 가지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문명개화'라는 것은 일본사람이 만든 용어인데, 제가 오래 전에 문명개화와 구한말에 대해 공부하면서 유길준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는데, 좀 빠진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중국사람이 어떻게 보았는가?'는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논의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마지막 부분인데, '자주적 세계화를 위한 지구주의적 민족주의'라고 하셨는데, 거기 소개한 국내개혁(전통, 근대, 탈근대 복합화), 통일(21세기적 연방제의 모색), 동아시아(국제역량의 활용), 세계(지구역량의 활용)는 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합니까? 그것은 결국 정치세력(정당)이 하는 것인데, 어느 정당 어느 누구 그런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큰 문제인데, 이 상태로서는 이러한 민족적 과제가 도저히 실현될 수 없다는 암담한 생각을 갖습니다. 이러한 과제를 제시한 선생님의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답변: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은 제가 답변할 능력이 있는 질문이라고 느끼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한두 마디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문명개화}라는 용어의  도입과정에서 중국은 왜 빠져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19세기 공부가 아직 충분치 못한 저로서 제한적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사회과학 용어들은 19세기 중반에 일본에 의해 번역되기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중국은 1840년대 아편전쟁이후 청일전쟁까지의 과정 속에서 자강이나 변법이라는  자기 변모의 노력을 부분적으로 보이기는 하였습니다만, 스스로를 문명의 중심이라는 입장에 서서 서양을 문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대단히 어려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이 상대적으로는 보다 쉽게 서양을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면, 조선은 일본보다는 훨씬 어려운 입장에 있었고, 청은 더 어려운 입장에 있었습니다. 결국 야만의 서양을 문명으로 받아들였던 일본이라는 서양의 하수 세력에 의해 청일전쟁에 패전함으로써, 비로소 중국은 엄청난 충격을 받게되고 대규모의 일본유학을 실시하게 됩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도 제 능력으로는 시원한 답변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유길준이 19세기의 정치현실 속에서 그 자신의 꿈을 현실화시키지 못한 것과 같이 개혁구상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정치세력을 통해 현실화될 수 있는가 하는 실천전략을 가지지 않고서는 하나의 규범적 또는 지적(知的) 논의로서 그칠 수 밖에 없습니다. 국내 정치사회세력이 아직도 전근대적 면모를 강하게 가지고 있는 속에, 어떻게 21세기 개혁을 실천할 수 있는 세력을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가 이 자리에서 답변할 능력은 없습니다. 다만, 그러면 이러한 지적 작업이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지적 작업이 비록 고도의 실천 전략을 충분히 마련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언술체계 차원에서의 투쟁으로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의 진정한 세계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정계, 관계, 경제계, 언론계를 명분적으로 충분히 설득해서 합의 기반을 마련하게 할 수 있는 올바른 세계화의 개념 정립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것이 역량있는 정치적 지도력과 결합하여 효율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은 실천전략 차원의 또 하나의 과제일 수 밖에  없습니다. 


질문: 우리 나라에서 '세계화'라는 말이 유행처럼 사용된 것이 94년 말에 대통령이 '세계화의 구상'의 발표이래 '세계화'의 개념이 참으로 혼란스러운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 각분야를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켜 세계중심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을 세계화라고 하고 있는데, 국무총리실 산하의 세계화추진위원회 하는 것을 보면, 온갖 좋은 일은 모두 세계화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국경 없는 무한경쟁의 세계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키워서 싸워서 이긴다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부의 세계화 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세계화추진위원회에서도 초기 과정에서 '세계화라는 개념규정을 어떻게 하느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드린 대로 "19세기의 국제화와 21세기의 세계화는 다르게 설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국제 경쟁력 강화나 부국강병의 목표만으로는 21세기의 중심국가가 되기는 어려우며, 21세기의 중심 국가들은  그것보다 더 나아간 목표들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19세기의 국제화를 기반으로 21세기의 새로운 세계화가 추진되어야 하나, 이에 대한 이해가 쉽사리 이루어지지 못한 채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세계화의 노력은 표류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차라리 '세계화'라는 용어를 섣부르게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21세기에 이 용어를 더 귀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구화의 추세는 우리가 세계화를 하던 하지 않던 간에 빠른 속도로 심화되는 상황이고, 이와 병행하여 국제적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지구화 연구도  대단히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명확한 개념규정도 없이 세계화를 국가발전전략으로 내걸긴 하였습니다만, 국제화와 세계화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혼란을 겪다 보니까, 모두들 실망해서 세계화라는 말 자체도 유행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전세계의 변화를 보면 세계화는 21세기의 중심 화두(話頭)일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계화라는 표현을 쉽사리 사용하기 어렵게 된 형편입니다.


질문: 외국인들과 이야기해보면 가장 설득하기 어려운 낱말이 '민족주의'라는 말입니다. 웬만하면 민족주의라는 용어의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데, 제가 최근의 민족주의라는 용어를 잘 표현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박찬호의 야구라든가 아니면 한일전 경기, 대우의 세계경영...등인데요 가만히 살펴보면 자본에 의해 철저히 민족이라는 말이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민족문학'이라는 작가 단체에 속해 있는데 저희 그룹에서도 더 이상 민족주의라는 것이 예전처럼 자본에 대항하거나 국제질서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하수인격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점차 커지고 있어서 민족주의의 깃발을 내리자고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지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지구주의적 민족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시고 있는데, 과연 그대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민족주의를 21세기로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의 의견을 여쭤보겠습니다.

 

답변: 제가 말씀드린 '지구주의와 민족주의'의 관계는 선생님께서 질문하신 '자본과 민족주의'의 관계와 조금 다른 맥락의 논의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지구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두 개의 상충되는 개념을 붙여 사용하려는 것은 아직 근대화의 숙제가 덜 이루어진 상황에서 또다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경우에, 우선 근대적 단위체로 작동하기 위해 군사적 기반, 경제적 기반과 함께 이념적 기반으로서 민족주의의 기반을 필요로 하나, 21세기의 민족주의는 지구주의를 활용할 수 있는 열린 민족주의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대 민족주의의 공격적 측면이 일국중심으로 강화되는 것은 타자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공격적인 형태의 민족주의가 아니고 한 단위체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민족주의는 불가피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경우엔 이러한 생존을 위한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되  타자들이 가질 수 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서 민족주의라는 용어 앞에 지구주의적과 같은 형용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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