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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근대사회과학개념 도입사: [文明]
 

2001-08-21 

「번역의 시대」에서 「창작의 시대」로

 

19세기 조선의 근대사회과학개념 도입사 연구는 21세기 신세계질서가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새로운 숙제를 풀기 위한 첫 걸음이다.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21세기의 세계질서는 5세기전의 근대국제질서의 등장에 비교할 만큼 혁명적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가능성은 우리로 하여금 근대국제질서의 언술체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탈근대 지구정치의 새로운 언술체계를 필요로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21세기의 새로운 언술체계의 필요성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오늘의 세계질서를 들어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언술체계의 해체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사회과학의 핵심개념들은 그 뿌리를 19세기 조선의 개화기에 두고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중심의 천하질서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던 조선은 19세기 중반에 유럽중심의 근대국제질서와의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만남속에서, 조선은 전통적 언술체계로 새로운 현실을 담아보려는 노력의 좌절을 겪은 후에, 유럽의 근대사회과학개념들을 초기에는 청을 통해서, 그리고 후기인 개화기에는 보다 본격적으로 일본을 통해서 도입하여 우리나름의 근대사회과학개념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한 조선의 근대 국제질서의 언술체계는 20세기에 들어서서 일본 제국주의의 30여년간의 암흑기를 거친 다음에 1945년의 해방 이후 한반도의 남쪽은 미국중심의 근대사회과학의 언술체계, 한반도의 북쪽은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 언술체계의 강한 영향속에서 오늘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 근대 사회과학 언술체계의 도입과 형성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첫째, 19세기 조선이 유럽의 근대 국제질서와의 만남속에서 전통적 언술체계를 넘어선 새로운 언술체계를 불가피하게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검토하고, 둘째, 이러한 현실속에서, 새로운 근대 사회과학개념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도입되었는가를 추적하고, 셋째, 서양의 근대사회과학개념이 일본을 거쳐 최종적으로 한반도에 도입되는 과정의 정치사회학을 따져보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우리의 정치학 나아가서는 사회과학이 19세기 이래의 [번역의 시대]를 넘어서서 21세기에는 [창작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조선이 유럽중심의 근대국제질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도입한 다양한 유럽의 근대사회과학 개념들 중에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문명이었다. 새롭게 다가오는 서양세력의 사고, 행동, 제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고, 또 불러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속에, 조선은 禽獸라는 표현에서부터 文明이라는 표현까지의 궤적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은 뒤늦게 西洋을 금수가 아닌 文明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西洋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국제관계를 들어내기 위한 새로운 개념들의 사용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명이라는 개념을 19세기 조선이 어떻게 도입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는가를 검토하기 위해서 19세기 조선의 衛正斥邪論 과 東道西器論의 문명관을 간단히 살핀 다음에, 文明開化論의 文明觀을 검토하고, 이러한 文明觀이 어떻게 도입되어 최종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는가를 알아보게 될 것이다.

 

禽獸에서 文明으로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근대국제질서는 포르트갈 주도의 16세기, 네델란드 주도의 17세기, 영국 주도의 18세기를 거쳐, 다시 한번 영국 주도의 19세기를 맞이하였다.  산업혁명이라는 역사적 변화속에서 지난 세기에 이어 두 번째로 영국이 주도하게 된 19세기는 16세기이래 이제까지 이루어졌던 국제화를 넘어선 보다 본격적인 국제화의 세기였다.  이에 따라서, 중국은 1840년대에, 그리고 일본은 1850년대에 유럽의 근대국제질서와의 본격적 만남을 시작하게 되었다.

 

조선도 1860년대에 들어서서 병인양요(1866), 제네럴 셔어먼호 사건(1866), 오페르트 南延君墓 도굴사건(1868), 신미양요(1871) 등을 거치면서 유럽의 근대국제질서와의 만남이 불가피하게 되어 갔다. 이러한 속에서, 당시 우리 사회의 주도적인 정치, 사회세력들은 서양세력에 대해 위정척사의 입장을 견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위정척사론을 대표하는 사람들중의 하나인 李恒老는 그의 [洋禍]에서 [中國의 道가 亡하면 夷狄과 禽獸가 몰려온다]고 지적하고, 이를 다시 [北虜(청)는 夷狄이니 오히려 말할수 있지만, 西洋은 禽獸이니 可히 말할 것이 못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李恒老의 이와 같은 [華夷之別]에서 [人獸之判]으로 전개된 斥邪思想은 그의 제자인 金平默의 [禦洋論]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는 중국과 조선은 人類이나 서양은 禽獸라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서 중국과 조선은 人道를 가지고 있으나, 서양은 禽獸之道
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人道의 내용으로서는 仁, 義, 禮, 智의 四瑞之德과 五品之論 및 禮樂刑政之敎를 들고 있다.

 

그러나 [人獸觀]에 기반한 위정척사론으로서는 점증하는 외압의 위기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게 되어, 1876년의 한일수호조규의 체결이후, 1880년대에 들어서서는 임오군란(1882)을 치룬 후 개화의 길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속에서 東洋의 道와 西洋의 器를 결합하여 보려는 東道西器論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申箕善은 農政新編(1880)序에서 道와 器는 서로 나누어져 있으며 동시에 서로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道의 내용으로는 三綱, 五常 과 孝弟忠信을 들고 있으며 器로서는 禮樂, 刑政, 服食, 器用을 들고 있다.

 

그러나, 東道西器論의 문명관은 어디까지나 東道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西器의 수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東道西器論을 대표하는 관료 였던 金允植은 1891년에 쓴 자신의 글에서 "나는 일찍이 開化之說을 심히 이상하게 여겼었다. 무릇 개화란 변방의 미개족이 거친 풍속을 고치고 歐州의 풍속을 듣고 점차 고쳐 나가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 東土는 문명의 땅이 어찌 개화하겠는가?...... 이 開發變化라고 하는 말은 文飾의 말이다.  소위 開化란 時務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그는 조선의 시무로서 "청렴을 숭상하고 가난을 제거하여 백성을 구휼하는데 힘쓰며 조약을 잘 지켜 우방과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衛正斥邪, 그리고 東道西器의 시각에서 서양세력과 뒤늦게 유럽을 국가발전모델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주변세력들을 다루어 보려는 노력들이 쉽사리 성공하기 어려운 현실적 한계속에서, 文明開化의 시각에서 歐美세력을 조심스럽게 19세기 국제화의 새로운 문명기준으로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만나게 된다.

 

19세기 조선에서 文明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대표적인 개화지식인이었던 유길준이었다. 그는 일본유학(1881. 5 - 1883. 1)의 초기에 福澤諭吉이 경영하는 時事新報에 쓴 [신문의 기력을 논함]에서 文明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1883년의 [漢城旬報創刊辭], [世界大勢論]등에서는 보다 본격적 문명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유길준은 [世界大勢論]에서 人類를 開化殊異에 따라서 야만, 미개, 반개, 문명으로 나누고, 오늘의 시점에서는 구주제국과 미국을 문명개화국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들이 결단코 개화의 극이 아니며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므로 노력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유길준의 이러한 문명관은 그의 대표적 저서인 [西遊見聞](1887-1889 집필, 1995출판)에서 다시 한번 요약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이 글의 제 14편에 포함되어 있는 개화의 등급에서 개화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千事萬物이 至善至美한 境域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그러므로 개화의 境域은 한정하기 불가능하며 인민의 재력의 분수에 따라 그 등급의 고저가 있고, 인민의 습속과 규모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음으로, 이러한 開化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行實의 개화, 學術의 개화 政治의 開化, 法律의 개화, 器械의 개화, 物品의 개화를 들고 있다.  이러한 분류는 福澤諭吉이 [文明論之槪略]에서 보여준 知德의 개화, 政治의 개화, 衣食住와 器械의 개화와 조응되는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1880년대 조선 개화 지식인들의 문명관을 전형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유길준의 문명개화론에 이어, 1890년대의 갑오개혁이후 국문과 영문의 독립신문, 국한문혼용의 황성신문등은 문명개화의 시각을 점차적으로 넓혀 나갔으며, 동시에 동도서기와 문명개화의 시각이 보여 주었던 문명관의 차이를 점차 수렴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전통과 근대의 복합화

 

유길준이 새로운 문명관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부딪쳤던 가장 커다란 문제는 전통과 근대의 갈등이었다.  일본과 비교하여 보다 무거운 전통의 짐을 지고 근대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했던 당시의 조선에서, 유길준은 일본의 문화개화기 지식인들보다 이 문제를 휠씬 더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는 [世界大勢論]에서 이미 전통과 근대의 균형을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으며 [西遊見聞]에서는 개화를 實狀開化와 虛名開化로 나누고 실상개화를 사물의 이치와 근본을 깊이 연구하고 이해하여 處地와 時勢에 합당케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개화하는 일이란 남의 長技를 취하는 것 뿐 아니라 자기의 善美한 것을 保守하는 데에도 있으며, 대개 남이 長技를 취하는 意向도 자기의 善美한 것을 더하기 위한 것이므로 남의 재주를 취하더라도 實狀있게 이용하면 자기의 재주이니 時勢와 處地를 헤아리고 경중과 이해를 판단한 후에 앞뒤를 분변하여 차례로 시행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전통없는 근대를 추구하는 사람을 개화의 죄인으로, 근대없는 전통을 추구하는 사람을 개화의 원수로, 그리고 스스로의 좋은 것을 버리고 남의 나쁜 것만 받아들인 사람을 개화의 병신으로 부르고 있다.

 

유길준의 19세기 후반 조선의 현실속에서 당면하고 있었던 최대의 과제는 단순한 서양문명의 소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통과 근대의 갈등이 아닌 조화를 더 나아가서 복합화를 당시의 어려운 국내외 상황속에서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문명관은 상당히 복잡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유길준은 [西遊見聞]에서 여섯 부문의 개화를 설명하면서, 五倫의 行實을 敦篤히 해서 사람의 道理를 아는 行實의 개화를 강조하고, 이 行實의 개화만은 천하만국을 통하여 동일한 것으로 천년만년의 장구한 세월이 흐르더라도 그 규모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설명은 동도서기의 문명관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政治, 法律, 器械, 商品의 개화는 고금의 형세를 참작하고, 피차의 사정을 비교하여, 좋은 점을 취하고 나쁜 점을 버리는 방식을 취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日本의 文明開化論

 

유길준은 1880년대 초반이래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서 서양을 조심스럽게 19세기 국제화의 새로운 문명기준으로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본의 문명개화로의 도움을 받게 된다.

 

동아시아는 19세기 중반에 들어서서 전통적으로 금수로 불러왔던 서양을 문명이라고 부르는 혁명적 변화를 겪게 된다.  동아시아 3국 중에 이러한 변화를 가장 빠르게 보여준 것은 일본이었다.  서양의 civilization 개념이 일본에 받아들여지면서 幕末부터 明治초기에는 禮儀와 交際로 이해되다가 점차 번역어로서 문명과 문화가 함께 쓰이는 짧은 시기를 거쳐, 福澤諭吉을 비롯해서, 西周, 箕作秋坪, 森有  등에 의해 文明開化 또는 文明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明治 開明 지식인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福澤諭吉은 1868년에 출판한 [西洋事情外編]의 [世の文明開化]라는 절에서 인류역사를 蠻野에서 文明으로 진보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영국과 같은 유럽국가를 문명개화국으로 부르고 있다.  福澤諭吉은 다음해인 1869년에 출판한 [掌中萬國一覽] 과 [世界國盡]에서는 인간들의 삶의 모습을 混沌, 蠻野, 未開/半開, 開化文明/文明開化의 네 부류로 나누어서 진보의 과정을 설명하고 중국을 半開化로 미국과 유럽국가들을 文明開化로 분류하고 있다.

 

그는 1875년에 쓴 본격적 문명론의 전개라고 할 수 있는 [文明論之槪略]에서 세계의 문명을 논하면서 유럽국가들과 미국을 최상의 문명국, 터키, 중국, 일본등의 아시아 국가들을 반 개화국, 아프리카 및 호주를 야만국으로 분류한 다음에이러한 분류의 상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반개화국가인 일본이 문명국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시간과 장소를 고려한다면 일차로 서양의 문명을 목표로 삼되 우선적으로 智德을 개발하고, 다음으로 政法을 개혁하고, 마지막으로 의식주나 기계를 추구해서 일본독립을 획득해야 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문명개화라는 개념은 岩倉使節團(1871. 11 - 1873. 8)의 구미 순방이후 일본사회에서 1870년대으 대표적 유행어로서 풍미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길준을 비롯한 조서늬 개화지식인들은 일본의 문명개화를 주목하게 된다.

 

文明과 Civilization

 

일본이 문명으로 번역한 civilization은 유럽근대질서의 중심세력이었던 불란서와 영국이 18세기 중반이래 그들의 삶의 중심성과 보편성에 대한 자기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용어는 어원적으로는 라틴어의 civis (시민), civilis (시민의), civitas (도시)에서 유래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와 로마제국의 삶에서 civitas는 야만과 문명을 구분 지어 주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자신들의 삶의 양식을 라틴어로 도시화합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도시밖의 야만에 대한 도시이느 문명에 대한 자기 우월감의 표현이었다.

 

civilization 이라는 용어가 오늘날의 문명의 의미로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757년에 불란서 혁명의 주요인물인 미라보의 아버지이며 중농학파의 일원이었던 미라보 후작에 의해서였다.  그 이후 불란서에서는 civilization 이라는 용어가 1770년대에 들어서서 폭 넓게 쓰이게 되었다.

 

불란서의 역사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프랑스와 기조(Fran ois Guizot)는 1828년에 소르본느대학에서 14회에 걸쳐 {유럽문명사(Histoire g n rale de la civilization en Europe)}라는 제목으로 문명의 발달이라는 시각에서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의 유럽역사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에서 기조는 civilization 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첫 번째 중요한 의미로서 진보와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으로, 진보와 발전의 핵심적 내용으로서는 힘과 행복을 생산하고 분배하기 위한 사회의 발전의 핵심적 내용으로서는 힘과 행복을 생산하고 분배하기 위한 사회의 발전과 능력, 감정, 생각의 면에서 개인의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기조는 문명의 양측면 중에 사회의 진보 측면에서 불란서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의 역사를 검토하고 있다.

 

한편, 영국은 불어의 civilit 보다 넓은 뜻으로 civilit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란서 보다 약간 늦은 1770년대에 들어서서 civilization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여 19세기초에는 일반화되었다.  그 이후 헨리 버클(Henry Thomas Buckle)은 1857년에 영국사를 문명사의 시각에서 본격적으로 분석한{영국문명사(History of Civilization in England)}라는 미완의 대작을 발표하면서 진보의 핵심 내용으로서 도덕과 지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란서와 영국이 자신들의 삶의 진보성과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 civiliz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근대국가 형성에 뒤늦었던 독일은 civilization 대신에 재배한다는 라틴어인 colore에서 유래해서 자연과 대칭되는 Kultur의 개별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면서 보편성을 강조하는 civilization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이러한 속에서 , 福擇諭吉을 대표로 하는 日本의 開明지식인들은 기조와 버클의 영향속에서 자신들의 문명개화관을 형성하고 문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21세기의 文明開化

 

19세기 조선은 근대서양세력과의 만남에서 일차적으로는 衛正斥邪論에 입각한 전통적 부국강병 자기모색을 시도하게 되나 현실적 한계에 부딪치게 됨에 따라 東道西器論에 입각한 중국형 국제화모델의 수용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으며, 보다 뒤늦게 文明開化論에 입각한 일본형 국제화모델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유길준을 비롯한 문명개화론자들은 전통과 근대를 복합화한 조선형 국제화 모델의 가능성을 모색하였으나 갑신정변의 좌절을 맛보게 되고 10년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문명개화론자들은 갑오개혁(1894)을 통해서 비로서 조선형 국제화의 실천적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나, 첫째, 조선이 겪고 있었던 전통과 근대의 갈등, 둘째, 청일전쟁이후 청의 영향력 대신 급격하게 커지는 일본의 영향을 현실적으로 견제하기 어려운 국제적 여건, 셋째, 국내역량의 효율적 동원 실패, 넷째, 조선형 국제화 모델의 실천전략적 취약성 등으로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좌절하게 된다.  그 이후, 고종을 중심으로 한 대한제국의 국제화를 위한 마지막 노력이 이루어졌으나, 결국 조선은 20세기 상반기에 일본화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1945년부터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하는 냉전질서의 형성과 함께, 한반도의 남과 북은 다시 한번 미국형과 소련형의 국제화 모델을 수용하게 되었다.

 

한반도가 냉전질서의 어려움을 계속해서 겪고 있는 속에, 세계는 21세기를 앞두고 서서히 냉전의 역사를 벗어나서 탈근대 복합국가들이 부국강병을 넘어선 복합목표를 새롭게 추구하는 신문명의 가능성을 맞이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는 전통과 근대의 복합화라는 19세기 조선형 국제화의 유길준의 꿈을 넘어서서, 전통, 근대, 그리고 탈근대의 복합화라는 21세기 한반도형 세계화를 통해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나가야 할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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